동국대 총동창회
 
 
 
4.19 특별좌담 - “4.19는 동국대, 4.18은 고려대”
  • 최고관리자 | 2020.05.28 16:49 | 조회 2141

    4.19를 평범한 학생 데모에서 민주혁명으로 승화시킨 것은 동국대 시위대가 외친 단 한마디, “경무대로 가자!"였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역할에 비해 과소평가된 것이 안타까워


    총동창회 · 모교가 동국대의 4.19 브랜드화에 적극 나서길

     

    50년째 동국가족등산대회 열어 4.19정신 계승


     

    일 시 : 202057일 오전 1030

    장 소 : 인사동 총동창회 회의실

     

    참석자

     

    박영식(정치57, 보훈처 4.19혁명국가유공자회 고문)

    최재오(법학57, 아람통상 대표 )

    현태길(정치57, 진로그룹, KBS 4.19 60주년특집 증인)

    김종규(경제58,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라동영(불교59, 동국대 4.19혁명동지회장)

    박홍규(농학59, 동국대 4.19국가유공자회 사무총장)

    윤청광(영문59,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

     

     

     사진(왼쪽부터) 최재오, 박영식, 현태길, 김종규, 박홍규, 라동영, 윤청광 동문

     

    19604.19 혁명은 동국대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동국대 시위대가 경무대(오늘의 청와대)에 맨먼저 진출함으로써 4.19 혁명을 완성시켰다. 하루 앞서 418일 고려대 시위대가 정치깡패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면서 서울의 분노를 촉발시켰다면, 다음날 동국대가 경무대에 맨먼저 진출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함으로써 마침내 4.19 혁명이 완성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동국대의 4.19 역사 평가가 과소평가되고 있다.

    올바른 역사 평가를 위해 동문사회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다. 따라서 당시 동국대생들이 어떤 시위를 벌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를 무너뜨린 기폭제가 된 당시 동국대생들의 활약상을 시위에 직접 참가한 동문들을 모시고 특별좌담을 갖는다. <편집자>

     

    -4.19 당시 동국대생들의 시위 상황을 현장 중심으로 얘기해보시죠.


    윤청광=시위 상황을 말하기에 앞서 4.19 혁명을 결정적으로 이끈 동국대의 역할이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당시를 돌아보건대 4.18은 고려대, 4.19는 동국대였다. 이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4.19는 동국대생들이 맨먼저 경무대에 진출함으로써 혁명이 완성되었다. 4.19를 평범한 학생 데모에서 민주혁명으로 승화시킨 것은 동국대 시위대가 외친 단 한마디, “경무대로 가자!”에 다 담겨있다. 자유당 독재의 심장부인 경무대로 진출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달성한 토대가 되었다. 그날 동국대학교가 없었다면, 그리고 경무대로 가자!”라는 외침이 없었다면, 4.19 혁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1, 2, 3차 경찰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리고 총탄이 빗발치는 사선을 넘어 경무대로 진출했던 동국대 시위대의 숭고한 항거 정신은 백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도 동국대의 이런 값진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고 억울하다.    

    나는 당시 동대신문 기자로 시위 시작부터 끝까지 참여했다. 기자 신분이었지만 시위대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동국대생들은 4.18 고대생 습격사건에 분개해 4191교시를 마치자마자 일제히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끓는다.

     

    최재오=동국대는 4.19에 앞선 47일 각 단과대별, 학과별 회의를 가졌으나 시위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동국대학교 학내 사정은 백성욱 총장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백 총장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내무부 장관을 지낸 분이어서 굳이 따지자면 친 이승만계였다. 관제 성향의 학도호국단이 방해했기 때문이다. 학도호국단은 학생들로부터 배척받고 있었는데, 4.19 당일도 운영위원장 등 학생 간부들이 교문에서 시위를 막았다. 물론 다른 대학 학도호국단도 데모 안한다는 각서까지 썼다고 한다(호국단은 추후 시위 가세).. 이 때문에 시위가 무산되는 듯했다. 그런데 4.18 고대 시위대에 대한 깡패들의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그중 사람이 죽었다는 신문 보도도 나왔다. 사망자는 오보였지만, 동대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법학과 4학년 김만율, 오주환, 나 셋은 그 소식을 듣고 신당동 김만율 하숙방에 모여 시국을 개탄하고 내일(419) 동대생들도 시위하도록 앞장서자고 결의했다.

     

    -4.19 시위는 이심전심으로 참가했군요. 참가 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시지요.

     

    박영식=대학가에는 전부터 민주당 비밀 당원들이 있었다. 동국대학 정치과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이기택, 중앙대 김인겸, 단국대 김상현 등이 활약했으나 동국대가 전국 대학의 모의국회와 웅변대회를 휩쓸 정도로 주도적이었다. 동국대 시위가 4.19 당일 이심전심으로 나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폭발성이 내연하고 있었다. 우리는 4.19 이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삐라를 제작해놓고 준비중이었다. 우리는 4.19 당일 동국대학교라는 대형 플래가드를 앞세우고 2000-3000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가자 그때 서울 거리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소규모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동국대가 나서자 용틀임이 분출한 것이다.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러 동국대 시위대 중 누군가가 경무대로 가자하고 외쳤다. 그 외침과 동시에 시위대를 이끌고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중앙청 앞으로 진출하자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따랐다. 어느 대학의 4.19 50주년사를 보면 그들이 다 한 것처럼 과장된 부분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우리가 보다 확실히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현태길=동국대가 4.19 시위를 주도한 것은 야성적인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치학과를 중심으로 시대를 이끄는 학생들이 많았다.

    우리는 주황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동국대학교라는 대형 플래가드를 앞세우고 학교에서부터 경무대 앞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 플래카드가 동국대의 4.19 역사성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라동영=동국대생들은 야성이 강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전통이 있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축구, 야구 경기에 동국대가 떴다 하면 타 대학이 꼼짝 못했다. 그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동국대가 4.19를 치고 나간 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당시 주요 연락책은 호국단이 아니라 각과 대표들이었다. 일본 집으로 된 도서관에 각 학과 대의원들이 모여 디데이를 정했다. 강의가 많은 날이 화요일 둘째 시간인데, 대의원들이 교수들에게 강의를 끝내달라고 요청하고, 오전 10시 일제히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래서 숫자가 많았다.

     

    -시위 코스를 말씀해주시지요.

     

    박영식=4,19 날 김운태 교수의 첫 강의가 끝나고 2교시 수업 시작할 때, 누구랄 것이 없이 나가자! 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교문이 굳게 닫히고 학도호국단과 학교측, 중부경찰서 경찰이 진로를 막았으나 학생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쉽게 저지선이 뚫렸다. 시위대는 교문을 박차고 퇴계로로 진출했다. 퇴계로변 교회 담장 아래에는 도로 공사를 위해 돌을 많이 쌓아놓았는데, 이 돌을 집어던지며 경찰과 맞섰다. 퇴계로 4-을지로 4가로 진출하면서 시위대가 짜임새있게 대오를 갖추었다.

       


     


    최재오=우리는 3-4학년이 주축이 되어 각 학과별로 모여 교문(현재의 후문)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호국단과 중부서 경찰 진압대가 교문 앞에서 저지하는 바람에 심하게 부딪쳤고, 이 과정에서 법과 3년 김태근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시위대가 중부서로 몰려가 연좌시위를 벌이고 김태근을 구출해낸 데 이어 을지로로 나와 내무부(현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반도호텔(현 롯데호텔)-시청-국회의사당-광화문 네거리-해무청(현 종합청사 자리)-중앙청-효자동-경무대(현 청와대) 코스로 진출했다. 처음 산발적으로 움직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직적으로 움직여 따르는 시민들이 많았다. 시위 대오가 흐트러짐 없는 단결력을 보여주니 강력한 시위 대오가 형성되었다. 그때까지 타 대학은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 동국대는 시내 중심가에 있어서 빨리 나올 수 있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우리는 주황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동국대학교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학교에서부터 경무대 앞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 플래카드가 동국대의 4.19 역사성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동국대학교라는 교명의 대형 플래카드는 유엔학생부인 법과 4년 김남수, 이용익, 오주환, 오계태가 학도호국단에 들어가 간부들과 다툰 끝에 반출해온 것이다.

     

    윤청광=이때 외친 구호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 ‘악질경찰 물러가라였다. ‘정부는 마산 사건 책임져라’ ‘정ᐧ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도 외친 것 같다.

     

    -경무대 앞의 상황을 설명해주시지요.

     

    현태길=우리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을 거쳐 중앙청 앞 경기도청에 이르자 하얀 가운 차림의 의대생들이 나타났다. 수도의대생(현 고대 의대)들이거나 서울의대생으로 보인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뒤에 동성고 학생들이 따랐고, 시내의 고교생들이 따라왔다.

    태평로 국회 의사당 앞에 이르자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무질서했으나 동국대 시위대가 이들을 선도하자 일사불란하게 따랐다. 이때 동국대 대오 중 누군가가 경무대로 가자!”고 외쳤는데, 이것이 민주혁명의 방아쇠가 당겨진 신호탄이었다. 중앙청 옆 해무청(해양경비청, 오늘의 종합청사 자리)에 이르자 진압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해 양 진영간에 밀고 밀리는 과격 양상이 벌어졌다. 노상에는 도로 공사를 위해 깔린 자갈이 널려있었는데 시위대들이 이 돌로 투석전을 벌였다. 땅에 묻기 위해 갖다 놓은 대형 상수도관을 동국대 시위대가 방패삼아 앞으로 굴리며 진격해 들어갔다.

     

    라동영=동국대 시위를 시간적으로 살펴보면 419일 오전 10시경 교문을 나와 중부경찰서에서 연좌시위를 벌인 뒤 내무부(을지로 입구) 앞에서 투석전을 벌였다. 11시경 시청 앞에서 다시 연좌시위를 하고, 곧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동국대생 이외 그리 많지 않았으나 동국대생의 함성 소리에 행인 등 시민들이 어느새 모여들어 가세했다. 이때 연대생들은 신촌로터리에 있었고, 중앙대는 용산역-서울역 사이에 있었다. 수도의대가 경기도청에 따라왔고, 성균관대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서울문리대와 서울의대가 교문을 나왔다는 소식이 있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일 때 시민들이 우리에게 합류했다. 이때 부정선거 다시 하라” “선거 원흉 처단하라고 외쳤다. 동국대 대오 중에서 누군가가 경무대로 가자!”고 외쳤다. “경무대로 가자라는 말이 없었다면 4.19는 평범한 데모에 그쳤을 것이다. 결국 이 구호 하나가 4.19를 혁명으로 규정하는 힘이 되었다.

     

    박홍규=농학과 학생들은 농학과 실습장에 가려고 준비중이었다. 실습장은 태릉 쪽에 있었다. 그런데 교문이 막히고, 규율부에서 시위대를 저지한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실습장으로 가는 대신 시위대에 합류했다.

    광화문까지 진출한 우리는 효자동 앞에서 최루탄과 소방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색의 물줄기를 헤치고 효자동으로 치고 올라갔다. 우리 뒤에는 서울대 문리대생들과 동성고 학생들이 따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찰은 중앙청 앞-효자동-경무대 앞 세군데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방어했으나 동국대 시위대가 상수도관과 전차를 밀고 가며 경무대 200m 앞까지 진출했다. 우리의 진격에 물대포를 쏘던 소방관이 겁을 먹고 도망을 가고, 경영학과 2년 전대길, 양승조가 소방차를 탈취해 경무대방향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때 발포가 나왔다. 동국대생들이 총알받이가 되고 말았다. 나는 왼쪽 발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가 오후 130분 쯤이었다. 총을 맞자 온 몸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느낌이었으나 본능적 위기의식으로 어느 집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다리를 다친 몸으로 담장을 뛰어넘은 것이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그 집에는 시민 시위대들이 벌써 숨어들어와 있었는데 총상을 입은 나를 발견하고 지나는 지프 운전사에게 부탁해 나를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연세의대)병원으로 이송했다. 이미 그곳에는 사망자와 총상을 입은 학생들 수백명이 들어와 있어서 나는 병실 대신 복도에 누워서 치료를 기다렸다.

     

    -동국대생들의 희생자가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요?

     

    김종규=경찰이 효자동 쪽 중앙청 담벼락 안에서 최루탄과 빨간 물감이 든 물대포를 마구 쏘아댔다.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차단하는 한편으로 시위자를 가려내기 위해 쏘아댄 것이다. 최루가스에 눈이 따갑고 물대포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사직동 대신고교 인근 중국식당으로 들어갔다. 중국집에 있는 얼마 후 경무대 방향에서 요란하게 총소리가 났다. 집중 발포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정부가 시민을 향해 총을 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총소리를 듣고 뛰쳐나와 겁없이 총탄을 뚫고 경무대 인근까지 진출했다. 그땐 무서운 줄 몰랐다.

     

    박영식=경무대 앞에서 노희두 군이 현장에서 숨지고, 26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태길=효자동 입구 1차 바리케이트 친 쪽에서 경찰이 처음 공포탄을 쏘았다. 진명여고 앞에서도 공포탄을 쏘았다. 동국대생들이 무시하고 날아오는 최루탄을 되받아 경찰에게 던지면서 경무대로 압박해 들어갔다. 최루탄은 바로 터지지 않고 몇 초 뒤 터지니 받아 던져도 되는 것이었다. 2 방어선을 뚫고 경무대 앞 3차방어선으로 몰려가는데 그때 경찰이 발포했다. 내 눈앞에 총탄이 날아오는데, 그때 소방차 위에 있던 학생이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에 총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학생이었다. 달려가 부축해 나오면서 지나가는 미군 차에 그를 실어 병원으로 보냈다. 구출된 학생은 당시 강문고 3년 이영민(포천군수 역임)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이영민을 부축해 나온 사진이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지에 특종 보도되었다.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 백형인 씨가 찍은 사진인데, 계엄령으로 국내 신문에는 보도되지 못하고 대신 미국의 저명한 시사잡지에 실려 세계적 특종을 한 것이다.

    나는 이영민을 차에 실려 보내고도 몇 사람을 더 구했다. 이때 동국대생들이 많이 총상을 입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까지 소식을 주고 받고 있지만 상당수는 저 세상이 된 사람이 되었다. 유공자 대우도 받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진 것이다..

     

    -4.19 이후 이야기를 해보지요.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최재오=동국대생들은 이승만 하야가 발표되자 즉각 종로경찰서를 접수하고 질서 유지에 나섰다.

     

    김종규=우리가 거리 청소를 하며 교통정리를 하자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시내 중심가 질서유지를 동국대생들이 선도했다. 시위로 전쟁 폐허처럼 돼버린 서울의 중심가를 우리가 앞장서 질서를 지킵시다라는 띠를 두르고 도로 청소를 하고, 교통정리를 했다. 그 사진이 도하 각 신문에 크게 실렸다. 내 고향 목포 유달산에 4.19 1주년을 맞아 4.19 기념탑을 세웠다. 목포 중앙극장에서 4.19 4주년 기념강연회를 갖기도 했다.

     

    현태길=집안 분인 현석호씨가 고향 경북 예천에서 국회의원을 지내고 장면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다. 나는 그 밑에서 보좌관 일을 했는데 19615.16 쿠데타로 정쟁법에 묶이자 나 역시 7년동안 손발이 묶였다. 많은 고초를 겪었다.

     

    최재오=동국대가 4.19 주체가 되었는데도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매스컴의 영향이 크다. 역사적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시위 참여자들이 나서고, 매스컴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언론계에 동국인 출신이 많지 않은 것도 불이익을 당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모 대학의 경우 활약상에 비해 언론에 크게 반영되고 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언론 홍보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과소평가 이면에는 우리 내부의 문제도 있다. 초창기 4.19 유공자를 선정할 때, 동문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가 4.19를 폄하한 결과,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던 4.19세대들이 학생 혁명의 가치를 적극 내세우지 못한 시대환경적 요인도 작용했다고 본다. 이때 보훈처 메커니즘을 아는 사람들이 실적과 관계없이 4.19 유공자로 등록되고, 지방 출신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사람들이 외면하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동국대는 부상자가 26명이나 나왔는데도 본인의 기피 또는 소극적 태도, 그리고 공을 널리 찾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평가작업을 다시 펴고, 그 자손들도 적극 나서야 할 명제다.

     

    박홍규=다시 반복하자면, 4.19혁명은 5.16 쿠데타와 12.12 반란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 이들 세력은 4.19를 부정했다. 4.19 공로자도 유공자 개념으로 수용하지 않았고, 이들 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4.19세대들이 침묵하거나 외면해 결과적으로 4.19 정신 자체가 증발해버린 인상이었다. 지금은 유공자로 등록되어 연금이 나오고, 명예가 되는 신청자가 많아졌다. 너도나도 등록하니 심사가 까다로워지고, 그러다 보니 쿼터제 비슷하게 인원을 안배하게 돼 4.19 주역이었던 동국대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동국대가 4.19 주역이라는 역사가 묻히고, 유공자도 누락되니 안타까움이 많다. 총동창회와 모교측에서 4.19 유공자 찾기와 역사복원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박영식=모두가 리더라는 아집 때문에 결집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4.19를 기리는 사업에 대해 구상이 있으면 밝혀주세요.

     

    라동영=4.19동지회장을 7년째 맡고 있다. 4.19 공로자, 비공로자를 구분하는데 이상한 풍토가 형성되었다. 내가 못먹으면 너도 못먹는다는 풍조가 있다. 개별적으로 보훈처를 상대하는 사람도 있다. 보훈처의 유공자 선정은 탄원서를 넣고 고위 공직자에 손을 써도 결국 실무자들 손에서 좌우된다. 심사위원들도 보훈처의 영향 하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눈에 내부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면 불안해서도 쉽게 선정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불이익 당하지 않도록 내부 단합부터 해야 할 것이다. 좋은 결실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중이다. 나아가 모교 교정에 4.19 혁명길과 시위 장소들을 지정해 남산 코스 관광 때 연동될 수 있도록 추진중이다.

     

    박대신(총동창회장:좌담회 당일 모교 입학식 참석으로 좌담회에 뒤늦게 참석해 별도로 멘트)=현재 만해동산에 세워진 동우탑은 4.19가 일어난 해인 19601125일 총학생회에서 건립했다. 4.19 당시 경무대 앞에서 총을 맞고 희생된 노희두 동문(법과3)19646.3한일회담 비준 반대 시위 때 희생된 김중배 동문(농학과3)을 기리는 비문이 19664.19 기념식 때 총학생회 이름으로 동우탑에 새겼다. 모교와 총동창회는 해마다 4.19기념 등산대회를 열고 선배들의 정신을 잇고 있다. 총동창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경무대 진출의 선봉에 섰던 선배들의 정의로운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모교 교정에 ‘4.19혁명로지정을 모교측에 제안하고 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선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 마련은 물론, 동국대학교의 4.19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고,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동문 제현의 적극적인 동참과 단합의 정신을 바란다. 무엇보다 개인적 아집을 버리고 대승적으로 뭉쳐주기를 당부한다.


    <진행 이계홍 홍보위원장, 정리 신관호 총동창회장 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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