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이정옥 前 kbs 글로벌본부장이 말하는 아버지 이강현 기자]
마산 고교생 김주열 시신 기사로 전 국민적 분노 촉발
박정희 대통령 지방순회 헬기 동승 거절...한국기자협회 1,2대 회장
이 동문은 1960년 4월11일 경남 마산(오늘의 창원시)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 군(마산상고 1년)의 시신을 참혹한 사진과 함께 현장 고발 기사를 써서 4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4.19 혁명의 서막은 2월 28일 대구에서 올랐지만, 동아일보의 김주열 군 시신 사진과 현장 고발기사로 전국민적 분노를 촉발시켰다. 이강현 동문은 당시 35세의 혈기있는 사회부 명기자였다. 그는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를 고발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부정선거 실태를 현장 르뽀 기사로 고발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군중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경찰의 만행과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벌인 사례들을 하나하나 취재, 보도했다. 기사는 특히 공무원들이 투표용지 번호표를 확인해 공개투표를 강요하고, 투표자 수보다 2배가 많은 유령 유권자, 3인조, 6인조, 9인조 투표와 도깨비표, 박쥐표, 올빼미표, 나이론표, 피아노표 등 희한한 방식의 투개표 부정을 고발했다. 투표용지를 개표장 뒷마당에서 불에 태워 없애고 새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투입한 현장도 잡았다.
이 과정에서 행방불명이 된 김주열 군이 바다에서 참담한 모습으로 떠오르자 이 동문은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시신 사진과 함께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각도까지 그린 도면을 신문 1면에 크게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전국의 학생 시민은 물론 전국의 어머니들까지 분노해 거리로 나섰다. 뉴욕타임즈, 타임지 등 외신도 이를 크게 인용 보도했다.
최근 이같은 내용을 전한 이 동문의 딸 이정옥씨(전 kbs 글로벌센터장)씨. 그는 “자신은 한국사회에서 보기 드문 부녀 기자의 이력을 갖고 있다”라면서 “아버지는 강직하고, 용기있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사회부 기자로서 소임을 다했으며, 특히 법조 출입기자로 이름을 날렸다고 소개했다.
취재수첩 없이 기억만으로 정확한 기사 쏟아낸 법조계 명기자
“아버지는 법원 검찰에서 발표하는 보도문을 다른 기자들과 달리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고 하셔요. 숫자만 수첩에 기록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신문을 보면 한 줄도 빼먹지 않고 중요 대목을 그대로 기사화했습니다. ‘두뇌 녹음기’가 있었던 셈이죠. 그러니 완벽하게 보도했다고 해요.”
사건기자답게 평소 잠바 차림을 고집한 이 동문은 동아일보 출근부에 도장을 찍은 적이 거의 없는 기록도 갖고 있다. 타각을 하지 않으니 어느날 회사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경리부로 달려가 “사회부 기자가 어떻게 출근부에 타각을 하나. 사회부 기자는 24시간 근무한다”고 따져 월급을 받아낸 적이 있다.
만년의 이강현 동문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군부정권에 비판적인 이 동문을 여러모로 회유하려 했다.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이 동문에게 지방 순회에 나서는 헬기를 같이 타고 가자고 제의했다. 이 무렵 박 정권은 신문윤리위원회법을 강제로 통과시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고 했다. 이 동문은 앞장서서 이같은 행태를 저지했다. 이때 이 동문은 한국기자협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아버지는 박 대통령의 헬기 동승 제의를 거절했어요. 대신 mbc의 이환의 기자가 탑승, 수행했다고 하더군요. 그후 이환의 기자가 mbc 사장이 되었고요.”
동아일보 지방부장 시절, 지방 주재기자가 양복지를 집으로 선물로 보낸 적이 있다. 부인이 이를 받아 퇴근한 이 동문에게 말하니 다음날 이 동문은 주재기자를 회사로 불러 호통치고, 오히려 좌천시켰다고 한다. 생활인으로서는 낙제점이었던 이 동문은 그러나 명 법조기자로서, 명 사회부 기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이로인해 한국기자협회 초대 회장과 2대 회장을 연이어 맡았다.
동아일보에서 중앙일보로 … 재벌기업 신문 한계 느껴
“그러나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겨서는 아버지가 상당히 힘들어 하셨다”고 이 전 본부장은 회고했다. 간부들은 넥타이를 매고 근무해야 하는 등 관료적 분위기가 팽만해 고민이 많았다는 것.
이강현 동문은 동아일보 지방부장, 출판부장을 지내고, 1965년 창간된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겨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판매국장을 역임했다. 중앙일보에선 ‘영원한 사회부 기자‘로서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재벌기업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와병을 얻어 회사를 퇴사하고 투병 중 1977년 5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민족문학대백과는 그를 “언론탄압에도 꺾일 줄 모르는 기질이 신문기자 사회에서 으뜸으로 손꼽혔다. 곧고 강직한 성격에 호주형으로 당대의 사건 문필가로 평가받을 만했다”고 평가했다.
이강현 동문이 있었기에 4,19 혁명의 변곡점을 맞았고, 따라서 그는 민주혁명의 대업을 완수한 기념비적인 성과를 올린 주인공이 되었다.
아버지 길 걸으며 아버지 정신 닮으려 노력..."유전적 훈장 같다"
한편 이정옥 kbs 전 본부장도 아버지의 길을 걸으면서 아버지의 정신을 닮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2년 전 kbs 사장 공모에 응모했으나 현 양승동 사장에게 밀린 바 있다. 그러나 '30여년 경력의 베테랑 방송기자', '현장통 방송기자‘ ’최초 여성 파리특파원’이라는 이름을 얻고 퇴직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유전적 훈장’ 같다“고 소개했다.
이강현 동문 딸 이정옥 前 KBS 글로벌본부장
이 전 본부장은 1999년 코소보 전쟁 현장을 누비며 참상을 전했으며, 코소보, 이라크전 등 전쟁 지역 취재와 예멘의 서기관 가족 납치사건, 터키 지진 현장 등 세계의 분쟁지역을 찾아 생생하게 전했다. 세르비아가 알바니아인들을 산 채로 파묻은 인종학살 무덤을 취재한 일은 언론계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런 현장 중심의 취재 보도는 역시 아버지의 현장 취재 열정의 DNA가 작동된 결과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4.19 보도는 외신에도 크게 인용 보도되는 등 역사를 바꾼 주인공이란 점에 무한한 긍지를 느낍니다. ‘영원한 사회부 기자 이강현’ ‘4.19혁명의 주역 이강현’이라는 자부심이 저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전통의 동국대 국문학과 1회 졸업생이라는 자부심도 큽니다.”
당시 동국대 국문학과는 양주동 박사 등 최고의 교수진 밑에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이강현 동문의 동기생 중에는 학계의 권위자였던 고 이병주 동국대 대학원장, 이동림 동국대 교수, 정익섭 전남대 대학원장, 현평효 제주대 총장, 박항식 원광대 대학원장, 김이수 충남대 교수 등이 있다.
<이계홍 홍보소통위원장, 65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