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동국대 동창회’로 개칭해 본격 활동 시작
동국대학교 총동창회가 올해로 102주년을 맞았다.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묵묵히 걸어온 길은 모교와 영욕을 함께 해온 역사다. 동창회의 한결같은 목표는 회원간 친목 도모와 모교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다.
동문들의 화합단결을 이끄는 여러 활동을 비롯 모교 각종 행사 참여, 재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수여 등에 때 맞춰 역할을 해왔다. 때로는 모교 발전을 위한 쓴소리도, 행동도 서슴치 않는 등 시대흐름과 사회적 요구에 따라 동창회 활동 모습도 달리했다.
본 회보에서는 이러한 동창회 역사를 기록하는 측면에서 3회에 걸쳐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우리 총동창회의 기원은 1908년 명진학교시대에 조직된 광학회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광학회는 1918년에 일심회로 개편되고, 이어 1928년에는 교우회로, 1941년에는 일광회로,
그리고 1951년에 동창회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약 35만의 회원을 거느리는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Ⅰ. 초창기의 동창회
최초의 동창회는 명진(明進)학교 1회 졸업생이었던 이종욱강용선권상노한용운강대련안진호 등이 상호간의 친목과 모교발전을 돕고자 1908년에 조직한 광학회였다. 그러나 광학회는 교원재학생졸업생으로 조직된 것으로 이는 오늘의 교직원과 학생회동창회를 합친 공동기구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초대회장에는 교장이었던 이보담이, 그리고 간사에는 졸업생인 권상노가 피선되었다. 이러한 광학회는 그후 본교가 불교사범학교를 거쳐 불교고등강숙으로 발전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18년 본교가 중앙학림으로 개편되면서부터 졸업생들은 종래의 광학회에서 탈피하여 졸업생만으로서 구축된 一心會를 조직함으로써 오늘의 동창회와 같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1918년 초대 일심회 회장에는 한용운이 취임하였고, 이어서 반년만에 신상완이 회장이 되고, 이어 백성욱 김법린 정병헌 등 순으로 역임한 바 있었다.
그 후 1928년 3월에 본교가 불교전수학교로 승격되자 종래의 일심회는 동년 5월 28일에 학우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학우회의 구성이 과거의 광학회처럼 재학생을 정회원, 교직원을 특별회원, 졸업생을 찬조원, 구직원을 특별찬조원으로 하고 또 그 역원은 이원적으로 하여, 회장 및 각부 부장은 교강사로 하고 간사는 학생 및 졸업생으로 선출하였다.
학우회 창립당시 회장에는 교장인 송종헌, 종교부장에 박한영, 총무부장에 김영수, 학예부장에 윤태동, 변론부장에 김법린, 체육부장에 이희상 등이 되고, 간사에는 박영희박윤진강유문박봉석박성희 등이 피선되었다. 학우회는 뒤에 교우회라 하였는데, 그 활동은 주로 同기관지인 「一光」지를 통해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모교발전을 위하여 노력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1929년에 불교전수학교를 정식으로 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데 크게 앞장 선 일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당시 졸업생들은 학우회를 통해 재학생 및 교직원과 혼연일체가 되어 강유문박윤진박영희박봉석박이하 등으로 하여금 진정서를 학교당국과 교무원에 제출케 하는 한편, 동맹휴학 등을 지지하여 1930년에 정식으로 재단법인을 조직함으로써 정식 전문학교로 승격케 되었던 것이다.
Ⅱ 중앙불교문학교시대의 교우회
본교가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되자 동년 5월 28일에는 종래 학우회로부터 학생회가 분리되어 나아가 순수한 학생자치단체가 됨으로써 학우회는 졸업생만의 조직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31년에 중앙불전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된 것을 계기로 교우회 정식 동창회로 만들기 위한 법적 절차가 이루어졌다.
곧 동년 4월 17일에 교직원회에서 「교우회와 학생회 분리의 건」이 제의되어 정식으로 결의됨에따라 동년 6월 18일에는 前 교우회 청산위원회가 열렸다.
마침내 동년 7월 4일에는 학생회와 분리된 새로운 교우회의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총회에서 아래와 같은 교우회 회칙과 실행세칙이 통과되었다.
◇ 중앙불교전문학교 회칙
제1조 본회는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우회라 칭함
제2조 본회는 중앙불교전문학교내에 치(置)함
제3조 본회는 회원 상호친목을 도모하며 본교의 진흥을 목적으로 함
제4조 본회는 본교 직원 급(及), 졸업생 급, 추천교우로서 조직함
제5조 본회에 하(下)의 역원(役員)을 치(置)함. 회장 1인, 총무 1인, 간사 약간인
제6조 회장은 학교장, 총무는 학감, 간사는 정기총회에서 회원중으로 선정함
제7조 회장은 본회를 대표하야 일체 회무를 총리(總理)함
총무는 회장을 보좌하고 사고가 유(有)할 시는 회장을 대리함
간사는 총무와 협의하야 일체 사무를 처리함
제8조 간사의 임기는 차회 정기총회까지로 함
제9조 정기총회는 매년 3월에, 임시총회와 역원회(役員會)는 필요에 응하야 회장이 차(此)를 소집하고 의장이 됨
제10조 좌기 사항은 총회의 결의를 요함
1. 본회 예산에 관한 건
2. 본회 회칙 변경에 관한 건
3. 기타 중요로 인(認)하는 사항
제11조 회원은 하(下)의 회비를 납부함
-현 직원 년액 1원
-졸업생 졸업시 3원
제12조 본 회칙의 실행세칙은 필요에 응하야 차(此)를 제정함
◇ 중앙불교전문학교 회칙 · 실행세칙
제1조 본회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좌의 사하을 실행함
1,기관지 발행 : 년 1회 발간하되 12월중에 발행 배부함
2.조위(弔慰)상벌 : (내용생략)
3.친목 원유회(遠遊會)
제2조 추천 교우의 추천방식은 하(下)와 여(如)함
회원 3인이상의 동의로 역원회(役員會)를 경(經)하야 대회에 통과함
제3조 간사 약간인 중 회계사무는 하교회계로, 서무는 도서과원(圖書課員)으로 하고 기타는 재경 졸업생으로 함
제4조 본교 구(舊)직원 급 추천교우의 회비는 수의(隨意)로 함
제5조 신입 졸업생 회비의 징수방법은 하(下)와 여(如)히 정함
-제2학기 수업료 납부시 2원
-제3학기 수업료 납부시 1원
이어서 회장에는 김영수와 총무에 김경주를 각각 선출하고, 간사에는 조학유와 김해윤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2년 3월에는 제2회 졸업생을 맞이하여 제2회 정기총회를 열고서 회원증가에 따르는 업무보강을 위하여 간사를 3명으로 결의하되 조명기(제1회 졸업생)와 이갑득(제2회 졸업생), 그리고 조학유 등 3명의 간사를 새로 선출했다.
이리하여 졸업생 상호간의 친목과 모교진흥에의 기여를 목적으로 출발했던 교우회는 다음 제3회 졸업생을 낸 1933년에 뜻하지 않게 회원들은 모두 모교 문제로 신경을 경주하여야만 하였던 것이니, 다름아닌 중앙불전 폐지론이 바로 그것이다.
즉 동년 10월 16일 학교설립자인 중앙교무원의 임시평의회에서 이사의 총사직으로 말미암아 신임이사가 선출되었는데, 이 신임이사회에서 중앙불전 폐지론이 나왔다. 폐교의 이유가 어디에 있었던 간에 모교의 발전에 늘 관심을 가지고 오던 교우회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즉각 재경 졸업생들은 10월 18일에 집합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토의를 하였다. 졸업생뿐만 아니라 모교 자체에 있어서도 이 문제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당시 교수였던 석전사문(石顚)沙門) 박한영이 근본교육과 명예사업과의 본말을 전도치 말라고 경고하였다(一光 제4호).
또 역시 교수였던 포광(包光) 김영수도 재단사업 정리에 대한 건의서를 통해 중앙불전 폐지의 부당성을 지적했었다(一光 제4호). 이러한 모교의 움직임에 졸업생들도 제각기 분개하여 한 마디씩 던지어 재단측의 번의(翻意)를 촉구한 바 있었다.
이와 같이 교우 회원간에 점점 고조화되어 왔던 모교 존폐의 위기의식은 마침내 재단이 보성고보(普成高普)의 경영권은 양도하되 중앙불전은 계속 경영할 것이라는 결의를 천명함으로써 해소되어졌다. 응당 그렇게 귀결되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중앙불전 폐지론이 폐지됨에 이르러 교우회원들은 안도의 숨을 돌렸다.
그리하여 해마다 졸업생이 계속 배출됨에 따라 교우회원도 늘어났다. 그러나 졸업생과 교직원만의 회비로서 운영되었던 교우회의 살림살이는 그리 충족한 것은 못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해마다 회지인 「일광」지의 간행과 춘추 2회의 친목회, 그리고 신입회원의 환영회는 궐(闕)하지 않았다. 이때까지의 동문은 대부분이 승려들이었다.
Ⅲ. 혜화전문학교시대의 一光會
1940년 교명이 혜화전문학교로 개칭되고, 또한 다음 해인 1945년 혜전 1회 졸업생이 배출되게 되는 것을 계기로, 교우회는 동년 3월 15일에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종래 중앙불전시대의 교우회를 「일광회」로 개칭키로 결의했다.
일광회란 이름은 교우회의 기개지인 「일광」지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었으며 그 회칙 내용도 교우회 때와 거의 같다.
일광회의 발족으로 명진 이래의 졸업생과 혜전졸업생이 일체가 되어 모교발전에 기여하였다. 일광회 발족 당시 초대회장에는 박윤진, 총무에 박봉석, 간사에 조명기정두석황성민문기석 등이 피선되었다.
Ⅳ. 동국대학교시대의 동창회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혜화전문으로 복구되고 개교를 보게 된 모교는 1946년 9월 동국대학으로 승격 개편됨과 동시에 종래의 일광회는 동창회로 개칭되었다.
해방 후의 동창회 임원은 혜화전문학교시대에 일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던 박윤진이 되고, 총무에는 조명기, 간사에는 김법린정두석이부열박원서 등이 각각 피선되어 모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그 기능을 일시 중지치 않을 수 없었는데 다행히 1951년에 모교가 부산 피난지(부산 교무원)에서 문을 열자 곧 그 재건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동년 8월에 부산 국제그릴에서 총회가 열리어 동창회의 재건이 다짐되었다. 이 때 부산에 자리잡은 동창은 물론 대구 대전 전주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그리고 출신별로는 1908년의 명진에서부터 중앙학림 중앙불전 혜화전문 동국대까지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감격적인 회포를 나누고, 동창 상호간의 친목과 모교발전을 새삼 굳게 다짐 하면서, 2대 회장에 백성욱박사를 선출하였다.
그 후 매년 총회가 정기적으로 열려야 했음에도 제반사정으로 근10년간 제때에 열리지 못함으로써 졸업생들 간에 적지않은 시비가 있어오다가 1960년 11월 임기만료로 자동해임이 된 임원의 개선이 있게 되었다.
부산이래 세 번째로 열리게 되었던 이 총회는 특히 현직으로 있는 총장의 동창회장 겸임을 분리시키려는 당시의 문교정책과 시국의 추세에 따라 개최된 것이기도 하였던 것인 바, 이 총회에서 제3대 회장으로 조명기 박사가 신임됨으로써 동창회의 기능은 다시 정상화되었다. 이 총회는 또 부회장에 이인성과 최계명을, 이사에는 나상익, 이철수 엄상섭 이기형 송수용 김윤환 신원범 조원화 김동정 유연진 손상교 오민근 이민휘 홍사필 김성섭 등을, 그리고 간사에 이승룡 이창열 김종관 김인선 등을 선출했다. 이로부터 동창회는 해마다 총회를 정상적으로 갖게 되었고 임원의 개선도 규정에 따라 정상적으로 시행됨으로써 동창회는 제 구실을 다하게끔 되었다.
1962년 3월 25일에 있었던 정기총회에서는 8장 25조에 걸친 회칙 개정안을 수정 통과시켜 동창회의 기능을 강화하는 동시에 동창회의 사업을 재확인하고 이어서 전면적인 임원개편이 있었다.
개정 회칙 통과에 따라 새로이 제4대 회장으로는 신경훈이, 부회장으로는 최계명과 도상효가 각각 취임되었고, 이사로는 홍순지 이외윤 조원하 이근양 김성수 조휘성 성정기 조창화 이원섭 김학송 탁광윤 김성섭 이기석 이인성 석명성 윤길구 심병두 주광조 김동정 등이 취임하였다.
새로 구성된 이사회는 동년 3월 31일에 우선 1억원의 장학기금조성과 동창회관 건립에 관한 구체안을 논의한 바 있었다. 다음해 1963년 2월 24일에 있었던 이사회에서는 모교의 건전한 발전과 질적 상향을 위하여 문교부와 재단법인동국학원 이사장에게 보내는 건의안을 각각 채택하기도 하였으니 그 건의서는 다음과 같다.
◇ 건의서
동국대학교 유지경영재단인 재단법인 동국학원은 1955년이래 불교분규로 인하여 정관에 의거한 정식이사의 선출을 보지 못하고 현금까지 임시이사로서 그 직무를 이행하여 오던 차제에 1963년 2월 13일자로 현 임시이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새로이 이사를 선출하는데 있어서는 상금(尙今) 불교분규가 실질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만큼 비구, 대처 어느 일방적인 종단인사에 의한 이사 구성을 초월하지 않고서는 불교 분규가 학원내까지 파급되어 학원에 일대혼란을 야기케 할 우려가 있사오니 사학을 육성 발전시키는 뜻에서 여사(如斯)한 실정을 깊이 통찰하시와 본 대학 동창회에서 추천하는 자 2인과 본 대학출신으로서 교육계의 저명인사로 동국학원 임시이사를 선임케 본 대학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여 주시옵기 1만여 동창생을 대표하여 자에 건의하나이다.
이 건의서는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으나 불교분규가 모교에 미치는 경향을 우려하는 나머지 이룩된 것의 하나였다.
그 후 1964년 5월에 있었던 총회에서 백성욱박사는 제5대 회장으로 피선되고 이어 1968년 7월에 있었던 총회에서도 제6대 회장으로 중임되었다.
새 동창회는 모교 발전에의 기여를 더욱 적극화 하기 위해 재단에 동창대표 2명을 이사로 참여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1963년부터 동창상호간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 친목을 더욱 두텁게 하기 위하여 동창회칙 제1장 총칙 제3조와 제6장 지부 제18, 19, 20조에 따라 지역별 또는 직장별 조직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정균을 회장으로 하는 부산 동창회가 조직된 것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국내외에 다음과 같은 조직을 보게 되었다.
◇지역별 조직 : 수원시, 인천시, 의정부·양주, 강화군, 파주군, 춘천시, 원주시, 속초시, 영북(속초 고성 양양 인제), 삼척군, 청주시, 충주시, 천안시·천원군, 아산군, 서산군, 보령군, 전주시, 정읍군, 광주시, 대구시, 포항시, 영주군, 부산직할시, 경남서부, 진해시, 함양군, 제주도,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일본동창회
◇직장별 조직 : .한국전력, 조흥은행, 한일은행, 서울시청, 남부영림서, 국민은행, 한국자동차보험, 한국감정원, 모교재직, 농협, 신민동우회, 철도청, 체신부, 주택은행, 대한석탄공사, 태평양화학, 대한통운동문회
◇학과별 조직 : 법우회(불교), 동철회(철학), 원축회(영문60학번), 동영회(영문), 화학과, 통계학과, 법오회(57법학), 동송회(62법학), 행정학과 5회, 동우회(정경1회), 동정회(정외), 경찰행정과, 농학과, 농경과, 농생과, 식품공학과, 사범대학, 동여회(여학사회), 혜문회, 2회동기회, 행정대학원, 경영대학원동문회
◇기타 조직 : 구농동우회, FODE회, 근로장학사, 선무부후원회, 동국산악회, 동국문학인회, 동대신문사동인회, 축구후원회, 동국언론인회, 서울시국어과교직, 동문교직회, 법조인회, 동록회, 동진회, 동청회, 동국테니스회, 동국시인회
동창회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는 모교 재학생을 위한 장학기금의 모금이다. 본 대학에서 졸업생들이 재학생을 위해 장학기금을 모아 장학금을 급여하기 시작한 것은 설립당시인 명진시대부터였다. 곧 이능화 著 「불교통사」(하편)에 의하면 「학도지필묵서책등 자본회담당」 이라 한 것처럼 학비 등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 후 본 대학 동창회는 각 시대에 걸쳐 장학기금을 모아 재학생에게 장학금을 급여하여 왔는데, 동국대학교 이후에 있어서는 1963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 사업이 추진되어 왔다. 곧 동년 3월에 동창회는 성적이 우수한 재학생에게 장학금을 급여키로 결정하였는데, 이 때 송재운(철학4), 김문환(정외4) 등 5명이 장학금을 받았다. 익년 1964년도에는 장학기금을 더욱 확대하여 지급대상자를 12명으로 늘렸다.
1966년에는 동창회사무실을 시내 서대문구 서소문동 84 한국빌딩 602호실로 이전함과 동시에, 모교의 발전을 학술연구와 체육진흥 양면에서 후원하고자 장학금 수여규정도 대폭 개정하여 장학금을 학술장학금과 체육장학금 두 종목으로 나누어 실시하게 되었다.
1964년에는 동창회 문고를 계획하여 다량의 서적을 모교 중앙도서관에 비치케 함으로써 재학생들의 면학풍토를 조성하였다.
1963년부터는 학과별 장학기금 조성운동이 일어나 불교장학회, 화학과장학회, 물리과장학회, 동영회장학회, FODE장학회 등이 발족되고, 또한 1966년부터는 한전동문회 등 직장별 장학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967년에 재일 동문들이 장학기금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 미국 영국 독일 동문들이 모교에 장학금을 계속 보내오고 있다.
한편 여학생 동문들도 1962년에 동여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에 윤을순 동문을 선출하고 장학회를 조직하여 재학 여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한편 각종 후생시설을 후원하고 있다.
1968년 광주를 비롯하여 매년 부산 대전 전주 대구 수원 인천 등지에 동문들이 모교의 양주동 서정주 이근삼 장경학 등의 교수들을 초대하여 「동국문학의 밤」 등을 개최하여 모교와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이밖에 체육진흥을 후원하기 위해서 동창회는 1963년에 동우체육회를 조직하였다가 모교에서 체육지도위원회를 설치함에 따라 이를 해체하였다. 또한 1968년에는 동국산악회를 조직, 대학과 동문, 재학생간의 유대강화 및 체력 향상에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1968년 이후 동창회는 시행 착오로 말미암아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이에 모교에 재직중인 이병주 이용범 남도영 교수 등은 그 재건을 돕고자 재정인 후원을 하는 한편 축구후원회를 조직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 5월 3일 시내 외교구락부에서 동문유지 33명이 모여 축구후원회를 발기, 창립하였다.
이 창립총회에서는 회장 문태식, 부회장에 김성섭 김준용 김진복, 상무이사에 민용식 조남철 김은하 류근창 김유복 김광학 홍봉래 임장용 최재구 이호성 한응국 이종필 정석구 이성호 한옥신 김용채 홍순지 이강욱 정형식 김영주 이병주 남도영 김상율 등 23명을 추대하여 71년도 기금목표를 천만원 확보에 두었다. 3일후인 5월 6일에는 제1차 상임이사회가 열려 이 자리에서 문태식 김준용 김성섭, 그리고 민용식이 각각 100만원씩을 희사하여 도합 400만원의 기금이 즉석에서 확보되었다. 상임이사회에서는 이 축구 후원회기금은 회장과 부회장의 공동명의로 영구적인 금전신탁으로 저금하기로 하고, 계속 성금을 모아 현재 7백여만원을 예치하고 있다. 축구후원회의 성공은 동창회 재건을 더욱 자신있게 하였다.
그 이후 뜻있는 많은 동문들의 노력과, 특히 학생처장으로 취임한 남도영 동문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침체되어 있는 동창회의 재건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된 것은 1971년이었다.
동년 12월 4일에 열린 정기총회에서는 4백여 동문들이 모여 종래 「명목만의 동창회」를 「일하는 동창회」로 혁신하자는 데 의견을 모아 임원개선에 있어 제7대 회장에 최재구 동문을 선출하고, 부회장과 임원 선임은 회장에게 위임함으로써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일부 회칙도 개정하여 동창회의 새로운 이미지 부각의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선진규 외 150여 동문이 발의한 명예회장 제도 및 여자동문의 적극 참여조항 신설과 지도체제 강화, 회원조직상의 미비점, 사무국 조직 결함등에 역점을 둔 개정안이 가결되어 구체적인 명문화는 새로 뽑힐 임원진에게 위임하는 한편, 前 회장이던 백성욱박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사무국도 동년 12월 22일엔 시내 종로3가 고영빌딩에서 모교로 옮기는 등 출발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1972년 2월 5일 마침내 45명의 새 임원진 구성과 더불어 제1차 이사회가 열려 동창회의 현안문제와 사업계획 등을 진지하게 논의하여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은 듯하였다.
제7대 회장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 : 최재구, 부회장 : 김준용 김동정 정임순
이들 새로 구성된 동창회는 정체상태에서 활동하는, 단절상태에서 연결되는 동창회로 만들 것을 결의, 동년 3월 30일 제2차 이사회를 열고 기금 조성과 조직 확대등 당면과제를 논의하였던 바, 당시 기금조성은 동창회 목적 수행을 위한 기본 원동력으로서 ① 회원상호간의 친목도모 ② 모교발전의 촉진적 역할 ③ 대화의 광장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와 함께 추진위원반을 구성하여 모금운동을 벌였다.
한편 조직 확대를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1973년 여름에는 최재구 회장외 32명의 회원이 참가, 대천해수욕장에서 「동창회 조직확대의 효율적 방안」이란 주제로 제1회 하계세미나를 열어 제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지회지부조직이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5월 31일 법조인동문회(김병리) 창립을 위시해서 한일은행(고일석), 국어과(유인식), 농학과(김흥배), 전국언론인회(최치근) 등의 창립이 동창회 조직확대운동에 큰 힘을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1972년 6월 23일에는 모교 서돈각 총장, 오법안 부총장의 취임 축하연을 개최하여 모교발전에 헌신해 줄 것을 격려하고 1973년부터는 동문으로서 사회 각계 각층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분을 「동국을 빛내준 동문」으로서 축하해 주기로 하였다. 곧 김진복 허동화 류근창 황갑손 백영철 김인규 등은 당선 승진 영전 취임 등으로 각각 축하의 주인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