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총동창회 발자취(2) … 동창회 중흥기를 맞다
  • 최고관리자 | 2021.01.26 10:48 | 조회 2443

    동창회보 100호 맞아 가로쓰기 · 컬러인쇄 · 증면 등 지면 쇄신

    1992년 백상빌딩 시대 개막 독자적 동창회관 건립 시급하다

     

    그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동창회가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72년 최재구(국문48) 7대 회장이 취임하면서 부터였다. 최재구 회장은 당시 42세의 혈기가 왕성한 젊은 국회의원이었다. 동창회 살림을 보좌할 사무국장 역시 한참 일할 나이인 31세의 윤천영(농학59)동문이 임명됐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7대 동창회가 가장 먼저 취한 일은 종로3가 로타리 고영빌딩에 있는 동창회 사무실을 모교 교수회관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임대료 등 재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일부 동문들의 사랑방처럼 비춰지는 부정적 시각때문에 동창회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명분이었다. 모교 교수회관 1층 교수연구실 한칸을 확보해 사무실을 옮긴 동창회의 급선무는 동창회 활동을 새롭게 정립하고 동문들과 소통하며 동국공동체 조직으로 거듭나는 일이었다.

     

    우선 동창회소식을 알리기 위해 모교 동대신문에 동창회 소식란을 신설했다. 이 소식란은 동창회 활동과 동문동정 등을 알려 동창회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메신저가 되었다. 뒤이어 과거 몇 번 지급하다가 중단된 후배장학사업이 다시 부활되어 19721학기에 한호남(농학4) 이병진(경제3) 전 웅(행정2) 3명에게 등록금 전액 장학금을 지급했다. 1973년부터는 1,2학기에 각 3명의 재학생에게 등록금 전액에 해당하는 금액을 장학금을 전달했다.

     

    19732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은하 최재구 최재구 황명수 김동영 최형우 안종열 이범준 동문 등 동문 8명이 당선되면서 동국인의 자부심이 고조되고 동창회 활동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을 축하하는 동국을 빛낸 동문 축하회1백여명이 넘는 동문들이 모인 가운데 327일 모교 학생회관 6층 구내식당에서 열렸다. 동년 5월에는 임시총회를 모교 중앙잔디밭에서 야외행사로 진행했는데, 충남 아산, 수원, FODE, 화학과동문회가 모범 지회 표창을 받았다. 이 해에 법조인동문회, 한국언론인동문회 등이 출범했다.

     

    현 혜화관 건물, 종단서 모교 교육시설 귀속에 큰 역할

     

    동창회가 이처럼 활발히 내실을 다져 가고 있을 때 모교는 중앙교육공무원 건물(현 혜화관) 귀속문제로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1970년 당시 종단의 선각자 지도자들이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77억원으로 중앙공무원을 매입, 이를 동국학원에 귀속시키려 하였으나 일부 지도자들이 이에 반대하여 중앙교육공무원 건물(대지 12천여평, 6)을 점거함으로써 학생, 교수들이 크게 동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동창회는 정기이사회를 소집(1973.4.28.)하여 모교 현안 문제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 재단과 종단, 학교측에 발송하고 그 조속한 시정을 요구하는 한편 대책소위원회를 구성 하여 총무원장 재단이사장 총장과의 연석회의를 갖는 등 그 해결책에 노력하였다.

    19746월에는 회장단회의 결의로 모교의 난국타개를 위해서는 보다 과감하게 참여할 수 있는 혁신자를 총장으로 선출해야 한다는 건의문을 내어 관계기관(문교부, 문공부, 총무원장 감찰원장 종회의장, 동국학원 이사회 등)에 제출했다.

     

    19753월에는 모교 정상화를 위한 관계기관 합의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관계기관 협의회는 종단=손경산 총무원장, 유월탄 총무부장 재단=김갑수 이사장, 이광재 사무국장 학교=이선근 총장, 조창화 총무처장 동창회=윤천영 사무국장 문교부=김상규 기획실장, 이대순 고등교육국장 등 9명으로 구성했으며, 성명서는 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에 게재됐다.

     

    1회 동국인의 밤 개최로 동문들의 자긍심 높혀

     


    1회 동국인의 밤 행사가 19721222일 무교동 호수그릴에서 열렸다. 대학동창회 사회에서 처음있는 행사로 각계각층에서 동국을 빛낸 동문들에 대한 축하와 송구영신의 우의를 다지는 기회였다. 1974년부터는 회원발굴이 활기를 띠는 등 조직이 확대되면서 동국의 밤 행사를 규모가 큰 세종호텔로 옮겨 개최했다. 이어 1978년 동국인의 밤 행사부터는 참여 동문들이 크게 늘면서 앰배서더호텔과 롯데호텔 등에서 개최, 화합과 단결의 장을 연출했다.

     

    197658일에 열린 정기총회에서는 최재구동문을 제9대회장으로 재선출하는 한편, 부회장에 문태식 김유복 황명수 박은회 박경희 정임순을 선출하고 회칙을 개정하여 회장1, 부회장 6, 이사 150(상임이사 50인 포함), 감사 3인으로 하였다.

     

    모교 개교70주년을 맞은 동창회는 그 기념사업으로 모교에서 창안한 장학기금조성운동에 적극 호응, 조찬회 등 각종 모임을 통해 이를 적극 밀고 나가고 있다. 1976428일 제21차 정기 이사회에서는 장학기금목표를 1억원으로 하고 그중 4천만원을 동창회가 마련한다. 동국 70주년장학기금 조성사업을 전동국인의 적극적인 장학재원을 구성하여 합리적으로 운영한다. 이 기금 운영에 참여한 모든 인사는 회원이 된다는 등의 강령을 마련하고 그 추진위원을 구성했다.

     

    동국인명록 발간-동우회보 창간으로 조직 활성화 나서

     

    [1976] 조직 활성화를 위하여 2만여 동문의 회원명부 동국인명록을 발간하였으며, 또한 그동안 숙원사업이었던 소식지 東友會報를 창간하여 바야흐로 동창회 중흥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동국인명록1965년판 발행 이래 11년만에 제작1976.5.8.)된 것으로 본회 임원과 각 지부 및 지회 조직현황 등을 실었다. 총 졸업생수는 24,448명이었으며 국내지역 24, 해외 4, 직장 17, 직능-친목 19, 대학-학과-동기 31개 등 지부·지회 단위조직은 95개 단위를 보였다. 회원 명부 명칭 동국인명록은 최세화(모교 교수) 송혁(동대신문사 주간) 윤천영 사무국장이 숙의, 확정했다.

     

    東友會報제호는 서예대가인 如初 김응현(문학49)동문이 흔쾌히 맡아주었으며, 모교에 재직중인 송혁 이황우 동문 등의 자문을 받아 윤천영 사무국장과 동대신문 편집부장 출신인 신관호 동문이 실무를 맡아 제작했다.

     

    1116일부터 12월까지는 모교와 함께 개교70주년기념 전국순회 민족과 민족문화학술강연회를 청주 대전 대구 부산 춘천 인천 강릉 전주 광주 수원 등 10개도시에서 열었다, 현지 교직 동문들을 중심으로 많은 고교생들과 동문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연사는 모교 장경학(법학) 서정주(국문학) 황수영(미술사학) 조연현(국학) 민병천(정치학) 이병주(국문학) 이기영(인도철학) 교수가 나섰다. 전국순회 강연회는 1977년에도 17개 도시에서 계속되어 지역동창회 존재감과 활성화에 윤활유가 되었다.

     

    [1977] 32일 개교70주년기념장학회 첫 장학금으로 7명에게 5만원씩 지급했다.

    55일 종비생 모임인 석림동우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다(회장 유월탄)

    92일 동우회보 첫 편집위원 위촉 및 회의를 한국자동차보험 박은회 사장실에서 열어 편집방향 등을 논의하고 매월 1회씩 정기 모임을 갖기로 했다. 위원장은 금덕연 국제신문 서울지사장 겸 상무, 위원으로는 최치근 최재복 임덕규 이경순 이병주 정세현 송혁 신찬균 동문 등이 위촉됐다.

     

    [1978] 617일 정기총회 겸 동국을 빛낸 동문 축하회를 모교 중강당에서 열어 제10대 회장에 최재구 회장을 다시 선출(4)했다. 부회장에 문태식 김유복 김성섭 황명수 이종호 류주형 박동호 박은회 안종열, 감사에는 김관성 박충환 박완일 동문을 선임했다.

     

    107일 모교에 경주분교가 교육부 인가를 받으면서 116일에는 경주동창회가 발기총회를 가졌으며 초대 회장으로 정준화 동문이 선출됐다.

     

    1212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동영 김상석 김은하 김제만 류한열 이상민 최재구 최형우 동문 등 8명이 당선되어 기염을 토했다.

     

    [1979] 32일 모교 재단 및 학교간부를 초청하여 간담회를 열고 모교 발전을 위한 동문회 역할 등에 대해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511일과 1018일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친 홈커밍데이 행사로 정기 이사회 겸 각급단위 동우회 임원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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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교70주년기념장학회 출범으로 후배 장학 늘리다

     

    [1980] 129일 개교70주년기념 장학회가 첫 이사회를 열고 출범을 알렸다. 기금은 4천만원으로 금융기관에 예치하고 40명에게 400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의했다. 장학회 임원은 고문= 최재구 동창회장, 박기종 모교재단이사장 이사장=정재각 모교총장 부이사장=박은회 동창회부회장, 최세화 모교학생처장 감사=황석연 변호사, 김한주 모교총무처장으로 구성했다.

     

    428일 동국산악회 한국마나슬루원정대 서동환 대원(공경3)이 세계 8번쩨로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했다. 서동환 대원과 대원들을 영접하기 위해 모교측과 협력하여 정재각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최재구 동창회장과 이인정 원정대장, 재단감사 설조스님, 정진영 동국산악회 지도위원 등은 카트만두 영접단으로 파견나갔다. 517일 한국마나슬루원정대 개선 카퍼레이드 및 귀국보고회가 있었다. 카퍼레이드는 197912.12 신군부 쿠데타에 이은 비상계엄으로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하였지만 요로에 건의하여 김포공항-여의도-시청앞-광화문-동대문운동장-모교로 이어지는 코스에서 펼쳐졌다. 다음날인 518일 광주사태와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있었던 엄중한 시기였으나 오픈카 7, 경찰 백차 2, 버스 4, 예비 사이카 2대가 동원된 특별한 퍼레이드였다.

     

    그 해 86일에는 이재웅(국문70)동문이 동아일보 창간 60주년기념사업인 국산 요트 파랑새호로 한국최초 태평양 횡단에 성공하는 낭보를 보내왔다. 81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환영리셉션에 최재구 동창회장과 정재각 총장 등이 참석해 꽃다발 등을 전하며 축하와 격려를 보냈다.

     

    930일 동녀회 후원회장인 박계산(행원77)동문이 건립비를 희사한 계산여학생관이 개관돼 여학생들 만의 휴식공간이 마련되었다.

     

    1981325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문 17명이 당선된 쾌거를 이뤘다. 고병현 이원범 김은하 맹은재 조병봉 이영준 정재철 이범준 황명수 임덕규 신순범 양창식 박익주 김영구 이영일 김유복 동문이 주인공들이며, 415일 모교 다향관에서 축하회를 가졌다.

     

    정재철 11대 회장 취임 임원 조직 강화 · 재정 안정 도모

     


    [1981
    ] 59일 모교 중강당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본회 11대 회장에 정재철 동문이 선출됐다. 10년여간 회장직을 맡아온 최재구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부회장으로는 문태식 홍봉래 김성섭 문명린 김동정 류주형 이영준 맹은재 우국일 홍숙자, 감사에는 김관성 김정웅 이능희 동문이 선임됐다.

     

    [1982] 3월 동국개교70주년기념장학회 이사회는 장학금 지급액을 800만원으로 증액했다.

    51일 정재철 회장은 신임 사무국장에 남기일 동문, 사무차장에 강진원 동문을 발령하는 등 사무처 기능 강화를 꾀했다.

     

    105일에는 본회에서는 2,5,6대 회장과 2대 모교 총장, 15대 모교 재단이사장을 지낸 백성욱 박사탑비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대승사에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1024일 제1회 동창회장은배쟁탈 영남동문 친선체육대회가 경주캠퍼스에서 열렸으며, 우승에 포항동문회, 준우승은 대구동문회가 차지했다.

     

    [1983] 27일 동국대학교동우장학회(재단법인동우장학회) 설립 정관을 제정하고 정재철 동창회장을 초대 이사장으로 하는 임원을 선출했다. 부이사장=홍봉래 김동정 이사=문태식 김성섭 박준형 정상영 유근창 우순이 황경석 남기일 감사=박충환 조희영. 총기금 73백만원.

     

    223일 경주대학 첫 졸업생 17개학과 136명을 배출하다,

     

    528일 제14차 정기총회에서 정재철 현 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재추대했으며, 동창회 재정 안정을 위해 부회장 숫자도 10명 내외에서 30명으로 늘어났다.

    48일 회장단에서 모교 야구부의 춘계대학야구연맹전 우승을 격려하기 위하여 선수와 감독 등을 초청해 남서울호텔에서 오찬을 가졌다. 92일에는 체육부에 야구후원금 1천만원을 전달했다.

     

    123일에는 학생취업추진위원회를 발족, 졸업예정자들의 취업 지원에 적극 나섰다.

     

    1221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동국인의 밤에서는 동국인명록5집이 7년만에 증보, 발행되어 참석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도서 모으기 · 체육부 후원 · 취업지원사업 등 활발

     

    [1984] 58일에는 범동국인 모서(募書)운동 추진위원회(위원장 정재철 회장)가 발족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하여 1년뒤인 198571일에 뉴욕지부(회장 임세창)에서 수집도서 4천권을 모교에 기증했다.

     

    914일 박계산 동문이 건립비 3억원을 희사한 계산고시학사(총건평 296, 지상3, 지하1)가 개관되어 고시준비생들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111일 산임 사무국장에 신익현 동문이 부임했다.

     

    [1985] 2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문 18명이 당선되었으며, 38일 당선 동문 축하회가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성황리에 열려 동국의 정치 파워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당선동문은 최재구 정재철 이영준 김동영 박익주 신순범 장충준 김영구 신민선 박규식 박왕식 조병봉 이상민 김용오 이영일 양창식 이범준 명화섭 등이다.

    330일 동우회보가 지령 100호를 발행했다. 지령 100호는 세로쓰기 신문에서 가로쓰기 신문으로, 흑백 신문에서 컬러신문으로, 지면은 8면에서 1216면으로, 제호 東友會報는 최재구 명예회장 글씨로 일대 쇄신을 가져왔다.

     

    1116일 정재철 회장은 제15차 정기총회에서 제13대 회장으로 다시 뽑혔으며(3연임), 이날 축구후원회(회장 민용식)는 동창회에 축구후원기금 3750만원을 기탁했고, 대학농구대회에서 우승한 모교 농구부에 격려금을 전달하며 응원하기도 했다.

     

    [1986] 711일 본회 사무국을 모교 학생회관에서 충무로 5가 대기빌딩 606(현 제일병원 소아병동)로 옮겨 모교 울타리 밖으로 다시 시무국을 갖게 되었다. 류주형 부회장은 대기빌딩 임대료 500만원을 출연했다.

    이어 다음해 27일에는 사무국을 대기빌딩에서 종로구 관훈동 성화빌딩 12(SK건설)으로 이전하고 현판식을 가졌다.

     

    동국문화상제정 자랑스러운 동국인상으로 진화

     

    [1986] 1219동국인의 밤에서는 동국문화상 제정 및 제1회 시상식을 갖고 동국을 빛낸 동문들에 대한 특별상을 수여했다. 수상자는 건학이념부문 조명기 모교총장 학술부문 서정주 모교 교수 예술부문 유현목 영화감독 등이다.

     

    [1987] 425일 정기총회에서 제14대 회장에 정재철 회장이 4연임되었다.

    81일 효율적인 회원관리를 위한 전산관리시스템 도입으로 회원 검색, 주소 변경, 회비 기록 등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1028일 모교 룸비니동산에 초대 동창회장 만해 한용운 시비가 건립되었다.

     

    1028일 동국ROTC 총동문회 창립 총회(초대회장 1기 원용선)가 열렸고, 1116일에는 동국라이온스클럽이 창립 총회(초대회장 정재철)가 마포 서교호텔에서 있었다.

     

    [1988] 4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구자춘 권노갑 길길곤 김동영 김영구 김홍만 류한열 박지원 박태권 신순범 유기천 유인학 이긍규 이기빈 이찬구 정기영 최형우 황명수 등 동문 17명이 당선되어 여전히 강한 정치인맥을 이루며 정치를 하려면 동국대로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했다.

     

    917일부터 102일까지 제24회 올림픽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으며. 김영남(레슬링) 김광선(권투)이 금메달을, 김태우(레슬링) 김상규(레슬링)가 동메달을 따내 국위 선양은 물론 동국인의 긍지를 드높혔다. 1028일 서울올림픽 출전 동문선수 환영회에서는 이들 4명에게 제2회 동국문화상을 시상하고 위로했다.

     

    [1989] 316일 플라자호텔에서 개최된 정기 이사회에 제15대 회장에 정재철 회장이 선출(5연임)되었으며, 임원 숫자를 상무이사 100인 이내, 이사 500인 이내로 하는 회칙을 개정했다.

     

    1113일 모교 발전기금 1백억원 참여를 위한 동국발전후원회 결성되었으며, 121일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최치근 동문을 상임부회장으로, 노덕일 동문을 사무국장으로 발령했다.

     

    1212일 제18회 동국인의 밤 행사에서 제3회 동국문화대상에 한국불교전서 10권을 완간한 이지관 총장을 선정, 시상했다.

     

    [1990] 220일 동국인명록 제6집이 제작 배포됐다.

    61일 장수정 동문이 사무국장으로 부임했다.

     

    922일 교육대학원동문회 창립(회장 석성일), 125일 정보산업대학원동문회 창립(회장 박충일)가 각각 출범을 알렸다.

     

    1219일 동국인의 밤에서 제5회 동국문화대상에 건학부문 권상로 모교 초대총장 학술부문 양주동 모교 교수를 시상했다.

     

    [1991] 119일 모교는 대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최재구 전 회장에게 명예문학박사, 정재철 현 회장에게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326일 지방자치제에 따른 구시군(기초의원)의회 의원 선거에서 동문 81명이 당선되었으며, 이어 620일 치러진 시도(광역)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동문33명이 당선되어 풀뿌리 민주주의의 역군이 되었다.

     

    611일 정기이사회에서 정재철 회장이 연임(6)을 의결했다. 125일 경주 지역개발대학원동창회가 창립(회장 이두철)했다.

     

    1219일 동국인의 밤에서 시상한 제5회 동국문화대상은 황수영 전 모교총장에게 주어졌다.

     

    [1992] 324일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동문18명이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강희찬 구자춘 권노갑 김영구 남평우 박규식 박근호 박제상 박희부 신순범 양창식 유인학 이긍규 이영창 정재철 최상용 최형우 황명수 동문이 주인공들이다.

     

    52일 동창회 사무국으로현재의 관훈동 백상빌딩 302호를 매입, 입주하였다. 그동안 동창회 사무국은 모교서소문 한국빌딩종로3가 고영빌딩모교 교수회관모교 학생회관충무로5가 대기빌딩관훈동 성화빌딩의 임대사무실을 거쳐 마침내 65평규모의 관훈동 백상빌딩으로 옮겨 안정적 보금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후 독자적인 동창회관 건립이 숙원사업으로 회장단마다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아직도 꿈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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