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창시절-
박 제 천
(국문64, 문학아카데미 대표/ 계간 문학과 창작 주간)
나는 1966년 [현대문학] 7월호로 시단에 첫발을 딛었다. 1965년에 3회 추천제의 1회와 2회를 거친 지 1년만이었다. 그 무렵에는 시인으로 등단하는 길이 쉽지 않았다. 시단으로 입장할 수 있는 출입구 정중앙에는 평균 4, 5년 정도 걸리는 현대문학 3회 추천제가 관문처럼 자리했다. 당시의 현대문학은 신춘문예 당선조차 1회 추천으로 간주할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다. 그밖에는 1년에 한번 뽑는 사상계의 신인상을 거치거나 그무렵에 창간된 현대시학, 문학춘주, 시문학과 같은 문예지에 당선되는 길뿐이라서 1년에 10명 내외의 신인이 배출될정도였다.
동국대 국문과 3학년 재학중에 시인이 되었지만, 시인이 되었다해서 달라질 일은 없었다. 문맹의 홀어머니나 밖으로만 나도는 형들과는 무관한 일이었고, 학교에서도 그 사정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당시의 동국대는 한마디로 문학 대학이랄 수밖에 없는 그런 대학이어서 다니기만 해도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되어버린다는 농반진반의 소리가 수긍될 정도였다. 그러니 3학년 등단 따위는 [동대신문] 문화면 마지막 하단에 사진과 함께 3센치 정도 소개되는 기사가 다였다.
한 4년 남짓 재학하는 동안 그곳 남산에서 만났던 학생 중 지금 문단에 활동하는 이름을 꼽아보면 줄잡아 헤아려도 30여 명이 넘는다. 고교 동기로 한 해 먼저 입학해 있던 홍신선과 처음으로 말을 나누게 되었고, 홍신선과 동기인 조정래, 문효치, 강희근, 문윤호, 임웅수, 하덕조, 류근택, 김남일, 유우희, 정해춘, 구영범 등과 사귀게 되었으며, 뒤에 서라벌예대에서 편입해온 천기철, 명기환, 정원모 등을 만나게 되었다. 같은 학년으로는 신상성, 홍진기, 김종성, 윤영창, 맹윤수, 김시중, 정해문 등이 있고, 영문과에 한용환이 있었다. 백숙천은 뒤에 편입하였다. 선배들로는 송혁, 이우석, 박진환, 박진호, 조윤호, 김초혜, 조병무, 윤석호, 김남웅, 정광수, 윤세철 등이 기억에 남고 오학영, 최원식, 홍기삼 등이 복학생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연극영화과에는 <60년대사화집> 동인으로 활동중인 호영송이 있었다. 나보다 늦게 입학한 후배들로는 선원빈, 신용선, 정의홍, 이계홍, 오대환, 김규화, 정지하, 김용언, 허정자, 안양자, 이국자, 문인수, 송유하, 홍희표, 김선학, 문정희 등이 있었고,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와서는 뒤늦게 국문과에 다니는 마종하를 비롯해 새로운 후배들인 정채봉, 이상문, 이원규, 이명주, 김창범, 최순열, 석지현, 석자명 등의 얼굴을 보았으며, 뒤늦게 철학과에 다닌다는 황석영을 만나기도 하였다.
나 역시 입학하자마자 우선 동대신문에 습작시를 투고하였고, 그 작품이 바로 발표가 되면서 수많은 문학청년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 결실이 내 곁에 들끓던 술친구들과 결성한 <다다> 동인이다.
<다다>는 우리말로는 ‘모두 다’를 가리키지만 우리는 트리스탄 자라처럼 루마니아어의 긍정사 ‘예 예’에서 시니피에(의미)를 배제한 시니피앙(記表)으로만 사용했다. 아무튼 그무렵 우리는 작품을 모아서 백부 정도를 가형의 초등학교 등사실에서 밀어냈지만. 우리는 그나마 나눠주기도 귀찮아 거의 다를 학교 뒷산에서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우리들의 <다다> 창간호는 그렇게 우리들 자신에 의해 분서되고 말았다. 그때의 동인 중 선원빈, 정원모, 정의홍, 김정희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고, 천기철, 문윤호는 소식이 두절된 상태다. 홍신선, 오대환만이 생존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무렵 우리는 하나둘씩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덩어리, 한패가 되어 강의실보다는 술집을, 교정보다는 남산의 숲속길을 휘몰아쳐 다니기 마련이었다. 나는 거의 일과처럼 술을 마셨다. 친구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을지로 5가에 집이 있었기에 교통 편리상 하나둘 씩 찾아오는 바람에 하루도 술을 거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체질에 술이 잘 받았다. 고교생 때 양주로 시작한 음주 실력인 만큼 소주나 밀주 약주 따위는 웬만큼 마셔도 영향이 없었다. 친구 중에서 특히 선원빈이 술을 좋아해서 서울이 싫증나면 시골로 원정을 다니면서 마시기도 하였다. .
2학년 어느 날, 선원빈이 우이동에 탁족이나 하러 가자며 나를 끌었다. 장미원을 조금 지나면 난계(蘭溪) 오영수(吳永壽) 선생댁이 있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선원빈은 그동안 난계를 사숙하여 자주 찾아뵙던 처지였다. 난계는 백면 서생을 따뜻하고 소탈하게 맞아주셨다. 뚱한 성격의 내 마음을 눅여주려는 듯 화제를 끊지 않았고, 당시 고교생인 아들을 불러내 나와 바둑을 대국케 하고는 관전에 열을 올렸다. 이제는 거의 바둑을 두지 않지만, 당시의 내 기력은 1급 상당이었다. 그 아들이 뒷날 천분의 화재(畵才)를 선보이다 요절하고 만 오윤(吳潤)이다. 그 뒤로도 여러 번 난계의 댁을 찾았다. 그때마다 선원빈이 동행하였음은 물론이다. 어느 밤인가, 만돌린을 손수 연주하며 유학생 시절의 연애담을 재미있게 털어놓던 난계의 모습은 지금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부자가 모두 유명을 달리했고, 선원빈마저 이세상을 떠나갔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어느 날 난계는 내 행색이 미심쩍은 나머지 내 신상에 대해 캐물었다. 시를 쓴다는 말을 듣더니 신석초 선생께 보내는 소개장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하지만 소개장을 받은 그 후로 나는 다시 난계의 댁을 찾지 않았다. 석초를 찾아뵙지도 않았다. 세밑쯤에 원빈이 ‘석초를 찾아뵈라’는 난계의 독촉을 다시 전해줄 때까지도 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엉뚱한 병을 앓고 있었다. 시를 쓴답시고 추천이나 당선이라는 제도권의 절차에 몸을 맡긴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내 나름의 순결성을 모독하는 일로만 여겼다. 시인의 명호를 어찌 남의 힘에 의지할 건가, 스스로 시인임을 자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의 발상이었다. 그 일로 친구들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다가, 해가 바뀌면서 마음을 바꾸기로 하였다.
1965년, 나는 한국일보사 논설위원실로 석초를 찾아뵈었다. 석초는 소개장과 작품을 읽더니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 추천을 받으러 왔구만’ 혼잣말을 하더니, 그 자리에서 갖고 간 작품의 제목을 바꾸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 이름자의 한자 표기가 본명인가를 확인하셨다. 그 작품이 첫번째 추천작인 「빈사(瀕死)의 새」였고 원제명은 「현기증처럼」이었다. 불과 몇 분 사이의 일이었고 자리에 앉으라는 말씀조차 못 들었던 터라 책상 모서리에 서 있다가 되돌아나오고 말았었다.
3개월 뒤, 그동안 쓴 작품 중에서 회심의 한편을 골랐다. 두 번째 작품 「심야의 방에서」를 들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실로 석초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이 작품을 보시는 동안 역시 몇 분쯤 우두커니 서 있다가 추천하겠다는 말씀만 듣고 쫓기듯이 나오고 말았다.
허나 다시 3개월 뒤 완료작과 소감을 써 갖고 석초를 찾아뵈었으나 이번에는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석초는 이상(李箱)과 미당(未堂)을 거명하면서 자신의 기명 제자는 두 사람과 같은 유의 시인이기보다는 고전적인 시인이기를 원한다는 희망을 피력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당돌하게도 ‘작품을 바꿔서 추천받을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하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피했다.
그로부터 나는 시인 따위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다시 습작에 몰두할 뿐이었다. 처음부터 추천은 하나의 과정일 뿐, 내 삶의 어떤 전환점이라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석초께서 전화를 주셨다. 뜻밖이었다. 작품을 갖고 와보라는 간략한 말씀이었다. 그 무렵 나는 징집영장을 받아든 채였다. 나에게 할당된 아버지의 유산에 기대어 4학년 1학기만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 프랑스 유학을 가리라 마음을 다지는 중이었다. 이런저런 고심 끝에 마지막 추천제니 한번 부딪쳐보자는 생각으로 작품을 한편 추렸다. 내 작품의 슈르 성을 지적당했던 터였기에 이번에는 동양풍의 작품으로 「벽시계에게」 한 편을 새로 써냈다.
다시 찾아뵌 석초는 저간의 단절에 관한 사항쯤은 없었던 일처럼 특별한 말씀을 내리지 않았다. 완료자에게 보내는 격려조차 없으셨다. 담담하게 작품을 두고 가라 할 뿐이었다. 같이 가져간 ‘완료 소감은 현대문학사로 보내게’ 하는 소리를 들은 건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설 때였다. 그로써 나의 문학청년기는 막을 내렸다. 그해 8월 나는 미리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아내와 홍신선의 배웅을 받으며 화전역의 입영열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