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2018 자랑스러운 동국인 대상 수상 이민휘 고문
  • 최고관리자 | 2019.02.25 10:30 | 조회 2354




     동국대학 나온 것이 내 생애 가장 큰 보람이자 긍지다

    미주한인회 산 증인이자 모교 미주동창회 창설의 주역

     

     동국대학교 총동창회가 수여하는 2018 자랑스러운 동국인 대상을 수상한 이민휘(52학번·정치과, 미주동포후원재단 명예이사장) 본회 고문은 90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다. 훤칠한 키에 건강미 넘치는 얼굴, 빛나는 안광, 깨끗한 피부가 인상적이다. 쏘아보는 듯한 눈빛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악수할 때, 큼직한 손의 악력은 상대방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60대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 고문은 미주한인회 창설의 산파역이면서 산 증인이다. 동국대 미주동문회가 어느 대학보다 역사가 깊고 견고한 결속력으로 뿌리를 내린 것도 이 회장의 헌신의 힘이 크다. 총동창회 송년회가 열린 지난해 1213일 서울 중구 앰배서더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동국가족이 주는 상이라 생각해 급거 귀국했다

     

    -먼저 자랑스러운 동국인 대상 수상 소감부터 한 말씀 주시지요.

    나는 미국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총동창회 걱정을 했습니다. 전영화 회장 체제가 총동창회를 안정시키고, 발전시키는 토대를 구축한 데 대해 안도했고 고마워했습니다. 내가 동국인 대상을 받은 것은 미주 한인사회와 동문사회를 수십 년동안 꾸려온 공로를 인정한 것으로 알고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이 고문과 인터뷰가 진행 중인데도 시시각각 후배 동문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는 통에 인터뷰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의 명성과 관록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인사하는 후배들을 깎듯이 대하면서도 인터뷰 맥락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응했다.

     

    이 회장의 경력은 독특하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에 1년 다니다가 자진 퇴학하고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이력부터가 남다르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국대 나온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자랑하고 있다. “내 생애 가장 잘한 일은 동국대학을 나온 것이다. 동국대학은 내 고향이다라는 이 고문은 동국대 재학시절 학도호국단장(오늘의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그는 자신의 대학시절은 문자 그대로 빛나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도 대학간의 경쟁이 심했는데, 그가 기개만큼은 서울의 모든 대학을 제압했다고 자부했다.

     

    나는 동대를 다니고 있지만 연대를 1년 다녔으니까 연고전이 있을 때는 연대생들이 나를 데리러 와요. 지원해달라는 거죠. 그때 내 몸에서 광채가 난다고 할 때였어요. 내가 연대 응원석에 앉아있으면 고대생들이 시무룩해져요. 그리고 동대와 연대, 동대와 고대가 야구, 축구경기를 할 때, 그들이 나무아미타불 도로아미타불외치며 야유를 해요. 그러나 내가 뜨면 하나같이 잠잠해지죠. 끽소리 못하고 곧 주눅이 들어버렸어요.”

     

    지금도 큰 키라고 볼 수 있는 1m80cm에 가까운 장신, 하얀 피부에 귀공자처럼 잘 생긴 얼굴이니 그가 뜬 것만으로도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학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도 했지만 서울 명동은 동대생들의 텃밭이 되었다.

     

    선친은 독립운동가인 이규갑 전 국회의원

    장인 이갑성 선생은 3.1 독립선언 33인 대표

     

    이 고문은 명실공히 명문 집안 출신이다. 선친이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이규갑(1888~1970) 선생이다. 이규갑 선생 이력을 두산백과에서 그대로 인용하면, 충남 아산 출신으로 한성사범(현 서울사대)을 졸업한 뒤 홍성 의병봉기를 이끌었고,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 13도대표 국민회의 중앙대표, 상하이 임정 실무책임자, 1927년 신간회 경동지회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여운형 선생이 이끈 건준에 참여해 재정부장으로 일했고, 2대 국회의원, 국회 문교사회분과위원장을 지냈다. 이순신 장군의 직계 10대 후손(이민휘 회장은 11대 후손)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정통 지도층 혈통을 이어받은 신분이다. 그의 부인 또한 3.1독립선언서 대표 33인중 한 명인 이갑성 선생의 여식 이봉희 여사다.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혼난 적이 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창씨개명을 해서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그래서 아버지께 매달려서 나도 창씨개명해달라고 떼를 썼죠. 그랬더니 아버니가 이런 돌상놈이 있나!” 하시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재정부장을 맡았습니다. 어느날 친일파 인사가 돈 보따리를 들고 와서 아버지를 회유하셨어요. 아버지께서 굶어죽어도 추한 돈은 안받는다고 호통을 쳐서 쫓아버렸습니다. 몽양 선생이 암살당하시고, 한동안 힘들게 지내셨지요.“

     

    미주한인총연합회 회장 등 미주사회의 중심

     

    -미주한인회 창설의 산파역을 맡으셨지요?

    “1971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제7대 회장과 9대 회장을 맡으면서 한인회 조직을 강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8대 회장 선거 때 갈등이 생겼습니다. UC 버클리 쪽 교민들과 패가 나뉘고, 분열했습니다. 나에 대해서 깡패 오야붕이라는 모략이 들어왔지요. 그 여파로 낙선했습니다. 나를 그렇게 음해했어도 새 회장 취임식 날 꽃다발을 들고 가서 축하해주었습니다. 깡패 오야붕이라고 했으니 모두들 보복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는데 내가 이렇게 나가니 놀라더군요. 그리고 다음 대엔 이민휘다! 하고 박수를 쳐주어요. 그래서 9대 회장으로 다시 봉사했지요.”

     

    교민회장은 교민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이지만 국내 정치와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만큼 중요한 단체다. 이 고문은 국내와도 꾸준히 소통했지만 교민사회의 권익 옹호와 복지 증진, 미국사회 발언을 하는 데 앞장섰다. 교포 주소록을 만들어 한인회 조직을 체계화했다. 교민회 조직이 기반을 다진 것은 그의 이같은 노력의 결실이다.

     

    미주동포 주소록을 국내에도 보냈습니다. 그때 김포공항장으로 동문 후배가 근무하고 있어서 그 많은 책을 보내는 데 큰 힘을 얻었습니다. 교민회 전화부가 얼마나 두툼합니까. 이것을 수천 부 보냈는데 동문 후배의 힘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 고문의 미주한인회 경력을 살펴보면, 1971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을 시작으로 1973년 샌프란시스코 한국라디오/TV방송 회장, 1979년 로스앤젤래스 한인회 제12, 15대 회장, 1980년 캘리포니아한인회 연합회장, 1983년 한미 케이블TV방송 회장, 대한민국 정부 재외동포 정책위원, 필립정보통신() 회장, 미주동포 후원재단 1, 2대 이사장, 재미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면서 교포사회 화합에 헌신했다. 그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 5.16민족상, 체육훈장 거상장, 호국영웅 기장을 받았다. 2016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미주동포 후원재단 명예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한인회장 재직시 어린이학교, 노인정, 애국지사 묘역 성역화 작업을 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리스에 있는 애국지사 묘역은 그의 손길이 묻은 것이다.

     

    조선 정부의 외교고문이라는 직함으로 일제 침략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 응징한 장인환 선생 묘역을 샌프란시스코 시에 조성했지요. 독립운동가 양주은 선생을 모시고 독립운동가 뿌리찾기 캠페인도 벌였습니다. 만리 타국에 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투사들의 원혼이 구천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 독립유공자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가슴 아팠습니다. 이런 일들을 해나가니 교민회가 하나로 뭉치더군요.”

     

    유학 다녀온 뒤 삼성 이병철 회장 비서실 근무

     

    이 고문은 동국대를 졸업하고 미국 산호세 대학 행정학과에 유학해 졸업한 뒤, 귀국해서 삼성에 입사했다. 이병철 회장 측근으로 일했으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회사를 그만 두고 1969년 미국으로 정식 이민을 갔다.

     

    이 고문은 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 게임 때 조국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재미 대한체육회장을 맡아 교민학생들을 선발해 통역, 자원봉사자로 서울로 보냈다. 이들이 모국에 갔다 온 뒤 모두 모국 사랑의 전사가 되는 것을 보았다. 이때 양분된 미주사회의 체육회를 하나로 통합시켰다. 그는 어딜 가나 통합의 아이콘으로 통할 정도로 교민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오해 아닌 오해로 마음 고생을 한 적도 있다.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당선돼 맨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환영회를 구성했다. 경위야 어떻든 나라의 대통령이 미국에 오니 환영회를 꾸렸는데, 군부독재자의 방미 반대 시위가 격렬했다. 민주적 가치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정부를 향해 비난하면 분열상만 보인다는 취지에서 그는 하나로 뭉치기를 바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나와 미국에 망명하면서 순회 강연을 할 때, 그가 발언권을 얻어 하나로 뭉치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자 강연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의도하지 않게 분위기가 흘러가자 그는 다음날 DJ가 묵은 숙소에 가서 정중히 사과했다. 그런데 다음날 교포신문에 이민휘 한인회장이 김대중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얼마후에는 동아일보에 깡패 오야붕 이민휘의 행적이라는 취지의 기사가 떴다. 이 고문은 귀국해 취재기자에게 달려가서 경위를 따졌다.

     

    편집국에 들어갔지요.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고, 해당 기자에게 사과를 요구했는데 안듣더군요. 그래서 여러 사람이 있으니 체면 때문에 그럴 것이다 여기고, 내가 도큐호텔에 머물고 있으니 어느 때고 나를 찾아 정식으로 사과하면 받아주겠다고 하고 호텔로 돌아왔어요. 그랬더니 밤늦게 해당 기자가 찾아와서 충분한 취재 없이 기사를 써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더군요. 그래서 그것으로 싹 씻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야당지로 시퍼렇던 때였지요.”

     

    후배들에게 국민과 나라를 위해 살아라당부

     

    이 고문은 동국대 미주동문회 산파역도 맡았다. 미주한인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 동국대 미주동문회를 결성했다. 나이가 든 뒤에는 후배들을 뒤에서 도왔다. 한인회 역사와 동대 미주동문회 역사가 함께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그의 활동 때문에 동국대 미주동문회는 재미 대학 동문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긴 역사(43)를 자랑한다. 재미 동대 동문회만큼 활성화 된 동문회가 없을 것이라고 그는 자부했다.

    -끝으로 동문과 모교 재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내 인생관은 선친의 좌우명대로 국민과 나라를 위해 살아라입니다. 인생은 retire가 없습니다. 나의 초기 이민생활의 개척자 정신을 후배들도 갖기를 당부합니다. 그것이 우리 동국정신입니다. 이와 아울러 연대와 결속을 부탁드립니다. 개인적 발전도 그런 연대와 결속 안에 있습니다.”

    90을 바라보는 노 선배의 빛나는 안광과 분명한 어조는 큰 울림이 있었다.

                           

    <인터뷰=이계홍 홍보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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