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동국인 대상 수상자 전순표 CESCO 회장 인터뷰
  • 관리자 | 2017.01.12 11:29 | 조회 705

    “환경위생 분야에서 일등 기업으로 우뚝서는게 목표”


    쥐박사에서 해충방제 굴지의 최고 기업 총수가 되다


    석박사급 연구진 200여명 … 끈기있게 평생 ‘해충방제’ 외길


    온화하고 자애스런 모습이다. 조용한 말씨를 통해 인자한 인품이 그대로 우러난다. 학창시절과 공직생활, 기업인으로 활약해온 지난 삶을 설명하는 (주)세스코 회장 전순표 동문(82세/53학번 농학과)의 모습이다. 80객인데도 60대 초반쯤으로나 여겨질 정도로 건강미 넘치는 용모, 활력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순표 회장이 동국대 총동창회가 제정한 2016 자랑스러운 동국인 대상수상자로 선정돼 지난 12월13일 서울 앰배서더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동국인의 밤’에서 수상패를 받았다. ‘국민의 건강과 재산을 지킨다‘는 사명 아래 불모지였던 국내 해충방제 분야를 평생 동안 개척해 환경위생 분야에서 세계적 기업을 일궈온 기업가정신이 높이 평가되었고, 10억 여원의 장학금과 발전기금을 모교에 기탁하였으며, 총동창회 24대 회장을 역임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동창회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영광의 대상을 수상했다.


    전 회장이 1976년 설립한 (주)세스코는 생명, 화학, 전자, 기계, 소프트웨어 공학분야를 망라해 최고기술을 집적, 해충기술연구소와 식품안전연구소, 이물분석센터를 구축해놓고 있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이면서 해충방제사업을 펴고 있는 기업이다. 200명의 석박사급 연구진이 근무하고 있고, 국내지사 80개소, 해외지사 20개소와 4,000여명의 서비스 컨설턴트가 네트웍을 갖춰 50만 고객을 대상으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오고 있다. 세스코는 식품안전관리에 관한 첨단 연구개발 시설과 축적된 노하우로 식약처 지정 HACCP 교육기관 및 시험분석 분야 자가품질 검사기관으로 지정됐으며, 식중독 예방과 식품안전교육, 분석, 컨설팅 등 종합 식품안전관리 사업을 수행중이다.


    지난 12월13일 오후5시 ‘동국인의 밤‘ 행사에 앞서 앰배서더호텔 커피숍에서 전 회장을 만났다.


    -‘자랑스러운 동국인대상‘수상을 축하합니다. 소감부터 한 말씀 주십시오.


    “총동창회에서 자랑스러운 동국인 대상을 수상하게 되어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학사 석사 박사 및 명예박사를 모두 동국대학에서 받은 순수한 동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다. 기업인·공직자·학자로서의 성공은 동국대학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동국인 대상 수상이 후배들에게 꿈을 꾸면서 끈기있게 노력하면 뜻을 이룬다는 귀감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학 재학시절의 얘기가 궁금하군요.


    “나는 출생지인 강원도 정선에서 농업고등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려는데 서울에 있는 모든 대학이 제2외국어를 선택과목으로 정해놓고 있어 제2외국어를 배워보지 못한 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동국대학교에서 신설된 농과대학의 선택과목이 생물로 되어있어서 농학과를 입학하게 되었다. 1년이 지난 후 농학보다는 경제학을 배우고 싶어 당시 부총장(전규홍씨)을 찾아가 전과를 부탁하였으나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후 내 운명이 농학이구나 하고 농학공부에 열중하였다. 농학과 1회로 졸업한 후 모교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 농림부에 취직을 하게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농학과 1회로 졸업식을 마치고 당시 농과대학장(이승우 박사)과 같이 교문을 나서는데 학장께서“여보게 졸업 후 무엇을 할 것인가?”하고 묻기에 “군에 가야지요.” 하고 대답했다. 학장은 지금 동국대학 농학과에 석사과정이 신설되었으니 석사학위를 받아놓으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길로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지에게 부탁드렸다. 한학기 등록금만 보태달라고 보채었다. 아버지는 반대하셨는데 어머니가 소 판돈 있으니 아버지를 설득해보라 하셔서 밤새도록 부탁하는 내 끈기에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다. 그길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고 학교의 추천으로 수원에 있는 농업시험장(지금의 농촌진원)에 취직이 되었다. 당시 맡고 있던 시험사업은 벼에 발생하는 병충해를 방제하는 연구였다.


     이 연구는 미국원조자금으로 실시되는 사업이어서 자금이 늦어지면 월급이 나오지 않고 학술비를 지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바에는 군대나 갔다 오자고 결심하고 같이 하숙하던 친구(김흥배 교수)와 같이 군에 자원입대했다. 대학원생도 학보병으로 인정되어 1년 반만에 제대를 하게 되었다. 학교에 찾아갔더니 마침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에서 전국 농과대학에서 2명씩 추천을 받아 시험을 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여 응시한 결과 합격하였다.


    합격한 직원은 전국시도에 한명씩 배치되었는데 나는 성적이 좋았었는지 수원본부에 배치되어 병리계에서 병충해에 대한 연구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4.19가 일어나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장면정권은 전국 대학생출신으로 국토건설요원 2,000명을 선발했는데 나는 좋은 성적으로 선발돼 전남 해남군에 배치되어 근무중 5.16을 맞았고, 곧 농림부로 발령을 받았다.“




    -전순표 회장 하면 쥐박사로 통하는데 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나는 강원도 정선에서 5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무원이었던 부친은 교육열이 높아 넉넉지 않던 살림인데도 5형제 모두 대학에 보냈다. 나도 동국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하고 농업시험장(농촌진흥원 전신)을 거쳐 농림부 농산국 농산과 재해대책계에서 쥐잡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농촌 출장을 가서 정부 양곡창고를 둘러볼 때 울화가 터졌다. 양곡창고는 말 그대로 쥐들의 세상이어서 양곡의 절반 가량이 쥐먹이로 사라졌다. 식량자급이 안되고 쌀 한 톨이라도 더 수확하기 위한 증산시책이 강도높게 펼쳐지고 있는데 농사를 지어 쥐만 살찌게 하는 셈이 됐다.


     쥐 피해가 그렇게 심해도 창고관리자가 눈만 감으면 아무런 문제가 안되고 대책이 없이 그냥 넘어갔다. 식량증산보다 쥐잡는 일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고 쥐에 관한 연구를 하려고 했으나 문헌이나 자료가 없어서 대책을 세울 방법이 없었다. 마침 영국정부가 ‘곡물저장에 관한연구’를 할 장학생을 뽑는 기회가 찾아왔다. 시험에 응시해 선발되어 2년간 영국정부 및 런던대학에서 유학을 하게 되었다.”


    -영국의 사정은 어땠습니까.


    “영국은 전통적으로 식량수입국이어서 완벽에 가까운 쥐잡기와 양곡보관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었다. 면소재지마다 쥐검사원이 배치되어있고 건물이나 토지에 쥐가 나타나면 그 시설의 소유자가 면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는 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신고를 받은 쥐검사원은 어떤 쥐인지 무슨 약을 써야하는지 조언해주고 정해진 기간까지 쥐를 잡도록 의무화했다. 전문회사에 의뢰하여 잡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에서의 공부는 주로 쥐와 각종 해충의 생태와 방제법에 대한 연구와 실습이었다.”


    -쥐잡기 날을 정하기도 하셨죠?


    “1964년 귀국한 내가 맨먼저 한 일은 정부에 쥐잡기날 선정을 건의한 것이었다. 무상 쥐약을 나누어주기 위한 예산을 얻어내기 위해 당시 경제기획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결국 영국에서 들여온 쥐약(항혈액응고제)을 농가에 나누어주기로 했다. 이 쥐약은 쥐가 3~4일 계속 먹어야만 죽게 되어있는 지효성약으로 쥐가 통증을 느끼지 않고 죽는 인도적인 약이었다. 한 농가에 1,000g 정도는 지급해야하는데 예산이 부족하여 200g을 지급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일주일에 걸쳐 일정량을 나누어 놓으라는 주의사항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약을 뭉텅이로 던져놓았으니 이 약을 먹은 쥐는 죽기는커녕 오히려 살이 찌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농림부가 살찌는 쥐약을 나누어 주었다고 떠들썩했고 당시 장관이 국회에 나가 우리 연구원이 영국에서 가져온 새로운 약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아 듣지 않은 것 같다며 해명을 해야 했다. 그 당시 쥐잡기날의 실적을 알기 위하여 쥐꼬리 모으기 운동도 실시하기도 했다.“


    - 우리나라 유일의 쥐박사라고 들었습니다.


    “농림부 사무관(계장)으로 승진하면서 농업자재검사소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검사기관이어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나는 모교 박사학위과정에 입학했다. 1973년 ‘한국산 집쥐의 생태 및 방제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쥐방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나밖에 없다. 공무원 박봉으로 박사학위 공부를 하다 보니 결혼반지를 팔아야했고 가족들이 끼니를 걱정할 때도 있었다. 아내(김귀자씨)가 피아노 레슨을 해서 꾸려나갔다.


    공직생활은 승진을 해야 하고 그럴 때마다 관계없는 부서로 옮겨다녀야했다. 과장으로 발령난 곳이 경제과장이었다. 쥐잡기와 관계없는 부서였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공무원으로서 계속하느냐 학교에 후배양성을 하느냐, 아니면 나의 기술을 살려 쥐잡기회사를 창업하느냐 세 갈레 길에서 헤매었다.”


    -사업을 벌이신 계기는요?


    “그 당시만 해도 쥐의 피해는 농업뿐만 아니라 전 산업에 확산되고 있었다. 이 피해를 누군가는 막아야한다는 생각에 고민이 빠졌다. 쥐 전문가로서 이것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나의 지식을 이용해 쥐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면 이것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돕는 길이다 라는 생각 끝에 관직(서기관)을 사직하고, 1976년 영국에서 보아왔던 쥐 방제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회사이름은 전우방제(세스코 전신)로 하고 7평 사무실에 집사람과 직원 하나를 데리고 총3명이 회사를 열었다. 그 당시 용역이라는 단어는 생소한 시대라 쥐잡아주고 돈 받는 회사란 아주 낯설고 우스운 회사, 미친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 모두 비웃을 때였다. 그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끈기있게 버텼다 이 끈기는 우리집의 가훈이기도 하다.”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환경과 위생이 중시되면서 세스코의 사업영역이 활기를 뛰게 되었다. 리어카에 쥐약을 싣고 다니며 팔던 시대는 가고 대형공장, 아파트, 호텔, 백화점, 병원, 식당, 물류센터 등에서 쥐는 물론 여러 가지 해충에 대한 체계적인 방제 시스템이 요구된 환경위생 중심세상이 온 것이다. 어느새 사세는 늘어나고 2014년 서울 강동구에 세스코 터치센터라는 대형빌딩을 지어 해충방제기술연구소, 식품안전연구소, 이물질분석센터 등 세계최고 수준의 R&D 시설을 갖춘 세계적 수준의 전문기업으로 성장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십시오.


    “쥐잡는 것으로 시작해 해중방제, 유해세균과 식품안전까지 영역을 확장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종합환경 위생기업으로 성장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된다. 여기까지 온 것은 끊임없는 연구정신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가 바탕이 되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환경위생 분야에 선구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해충과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의 유해세균에 대한 꾸준한 연구개발과 첨단해결책으로 세계적 일등 전문기업으로 우뚝 서는 것이 목표다.”


    전 회장은 부인 김귀자 여사(75세)와 함께 2남1녀의 자녀를 둔 다복한 가장이다. ROTC 2기회장을 지낸 전진표(60학번 임학과) 동문이 친동생인 동국가족이기도 하다.


    인터뷰어 · 이 계 홍 <총동창회 홍보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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