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 고시공부하다 책이 좋아 책 출판에 평생 바쳐
올해 범우사 창립 55주년, 펴낸 책만도 5000여종
출판사 정점에 선 비결은 “좋은 필진 개발과 인적 네트워크 관리”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윤형두 회장(법학과 55학번)을 만나기 위해 파주시 출판단지의 종합출판 범우(주)를 방문하는데, 4층 드넓은 사무실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먼저 반가이 맞아주었다. 이들과 수인사를 나누는 광경을 맨 뒤쪽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중절모를 쓰고 마스크를 한 장년의 풍모다.
필자는 그가 편집 일을 보는 고참 직원으로 알고 그를 비켜 회장실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동행한 신관호 총동창회장 특보가 “윤형두 회장님이십니다” 하고 소개를 했다. 회장실은 별도로 마련돼있고,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면 비서실의 비서가 손님을 맞아 안내해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런 것들이 깡그리 무시되었다. 혹 결례하지 않았나 싶어 면구스러웠는데, 윤 회장은 의식하지 못했는지 개의치 않고 스스럼없이 필자 일행을 소파로 안내했다.
회장실이 별도로 갖춰진 것이 아니고, 또 비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오픈된 사무실의 한켠이 회장실이다. 일반 기업 회장실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손만 뻗으면 어디서든 펴볼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이 서가에, 혹은 탁자에 놓여 있는 것도 차이점이다.
윤 회장은 권위의식이란 것이 없어보였다. 근엄함과는 거리가 먼 자상하고 편안한 인상이다. 이런 품성이 대한민국의 ‘지성 인맥’을 형성해온 힘이 아니었나 생각해보았다. 피천득 차범석 리영희 송건호 남재희 김태길 김동길 김상현 한승헌 한완상 장을병 구상 이병주 김지하 김병익 이청준 임헌영 조정래... 대통령에서부터 정계, 학계, 종교계, 언론계, 문학인까지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이 범우(주)라는 울타리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폭넓은 인맥 관리와 품넓은 도량에서 나온 힘이었다고 평가된다.
범우사는 1966년 창립돼 올해로 55주년이 된다. 이름을 ‘범우(주)’로 바꾸었을 뿐, 변함없이 묵묵히 단행본 출판 외길을 걸어왔다. 범우사는 70년대 단행본 전성시대 민음사, 문예출판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출판사의 하나로 우뚝 섰다. 그러나 범우(주)를 제외하고 두 출판사는 열악한 출판시장과 함께 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범우(주)만이 옛 명성을 유지하며 꾸준히 정상의 길을 걷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윤 회장을 두고 그의 오랜 벗인 한승헌 전 감사원장은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는 끈질긴 집념과 바다와 같은 도량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했는데, 바로 그 점 때문이 아닐까.
“범우(주)는 반짝 하는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꾸준히 나가는 스테디셀러 출판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출판사들이 대체로 한꺼번에 고기를 잡는, 이른바 베스트셀러를 노리는 투망식 출판을 고려하는데 우리는 묘목을 심어서 열매를 따는 ‘과수식 출판’, 역사의식을 갖는 기념비적 ‘비석식 출판’을 지향합니다. 조그만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좋은 책을 만들자는 철학이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100종 이상의 책들이 꾸준히 나가 출판 불황이라는 요즘에도 경영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범우사 창립 55년 동안 펴낸 책만 자그마치 5000여 종(種)에 이른다. 1년에 거의 100권에 가까운 책을 55년동안 꾸준히 펴냈다는 계산이다. 이런 책 중에는 ‘한국의 고지도’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돈황’ 등 병풍만한 책도 있다. 잘 팔리지 않지만 '비석을 세운다'라는 이름 아래 수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간행한 저작물들이다.
-펴낸 책들 중 대표적인 책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범우문고지요. 지금까지 326권이 나왔는데, 피천득 선생의 ‘수필’, 법정 스님의 ‘무소유’로부터 시작한 문고입니다. 독서의 생활화와 양질의 책을 보급하기 위해 문학·사상·철학·고전·역사·학술 분야를 망라한 종합 교양문고지요. 언제 어디서나 저렴한 가격으로 부담없이 폭넓게, 그러면서도 깊이있게 교양과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 책들입니다.”
범우문고 가격은 3900원에서 4900원 사이다. 말 그대로 커피 한잔 값이다. 일본열도를 독서 열풍으로 몰아온 ‘이와나미 문고’에 필적할 문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필자 역시 ‘범우문고 세대’다. 범우문고를 통해 시대를 고민하고, 내일을 예비하며, 야망을 꿈꾸었다. 70년대 초반부터 나온 ‘범우문고’는 젊은이들에게 지적 갈증을 충족시켜준 책들로 평가받아 왔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이에 대해 윤 회장은 “세태 탓보다 학교에 사서 교사가 없다는 것이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할 수 없는 풍토를 만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일본에는 각 학교마다 사서 교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초등학교에 사서 교사가 일부 파견되지만 기간제 교사로 신분이 보장되지 않은 비정규직이지요. 시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고교에도 사서 교사가 배치되어야 합니다. 국어 교사가 사서 교사를 겸하고 있는데, 입시 교육에 치중하는 그들이 올바로 독서교육을 시킬 수 없습니다.”
대입을 위해 기계적으로 달달 외는 독서법으로는 인문학적 소양이나 예술적 깊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지론이다. 그러면서 김구 선생의 ‘문화강국론’을 강조한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준다’라고 하셨지요. 이런 높은 문화의 힘과 소양은 책에서 나옵니다.”
올곧은 역사관, 꼿꼿한 자세, 낙관주의적 사고가 80대 ‘노인의 전형성’을 단호히 배격하는 모습이다. 산을 좋아하고, 또렷한 기억력과 훈계식이 아닌 설득력있는 화술도 노인의 범주를 벗어나게 한다.
-회사를 운영하시면서, 그리고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습니까.
“나쁜 일을 하면 쉬울 수 있는데, 옳은 일을 할 때가 힘들었습니다. 조금만 물러서면 길이 쉽고 편할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의 갈등이 없을 수 없지요. 그러나 좋은 일,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생명력이 있다는 점을 책을 통해 배우며,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한때 빛나는 지성을 갖추고, 시대를 선구했던 사람들이 변절하여 노후가 쓸쓸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던 천관우 선생, 김동길 교수, 김지하 시인... 긴 이야기는 생략했지만 그들을 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윤 회장은 1971년 박정희 집권 시절 월간 ‘다리’지 사건으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었다. ‘다리’는 ‘사상계’가 폐간된 이후 ‘제2의 사상계’로 불릴만큼 당시 지성을 대표하는 정통 시사 월간지였다. 시사 정론지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지식인 사회에서 ‘다리’가 나오자 폭발적 인기를 얻어 창간 당시에는 발행 부수가 6만부가 넘었다. 김지하 시인의 풍자시와 한승헌, 김동길 김태길 안병욱 씨 등 논객들이 참여해 지식인 사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가 ‘다리’ 지에 게재된 문학평론가 임중빈 씨 글을 문제삼아 1971년 2월 임씨와 주간 윤형두, 사장 윤재식 씨를 구속했다. 이때 서울형사지법의 공안사건 영장 담당인 유태흥 부장판사(나중 대법원장)가 발부한 구속영장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극좌파 학생운동인 68년의 파리 5월 혁명에 의한 드골 정권의 타도와 미국의 극좌파인 뉴레프트 활동의 타당성 등을 전제하면서,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되, 문화혁명을 통한 정치혁명에로의 길만이 학생운동의 정도이며, 무엇보다도 능동적 참여를 통한 변혁이 필수의 것으로 요청된다고 논단하여 은연중 우리 정부의 타도를 암시,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고 두 윤씨는 이를 알면서 게재했다."
별것도 아닌 것을 어마어마한 공포심을 심어 구속했는데, 이로인해 윤 회장은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1년여의 법정 투쟁 끝에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때의 지식인들이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만든 인적 자원이 되었습니다.”
윤 회장이 출판문화협회장으로 있을 때 도서전시전을 열었는데, 이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찾아와 성황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그를 감옥에 보냈는데, 그는 개의치 않고 딸을 안내하며 격의없이 대화를 나눴다.
윤 회장은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한국출판조합협동조합 이사장 등 출판 관련 대표를 두루 역임했지만, 맡은 단체마다 흑자를 내고 나온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윤 회장은 수필가로 널리 알려져있다. 1972년 ‘수필문학’을 통해 문단 데뷔한 이래, ‘넓고 넓은 바닷가에’ ‘책의 길 나의 길’ ‘아버지의 산 어머니의 바다’ 등 20여 권의 수필집과 출판 관련 저서를 펴냈다. 이중 ‘넓고 넓은 바닷가에’와 ‘자화상’은 5판을 찍어냈다.
-모교 재학시절은 어땠습니까.
“돈을 벌어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힘들었지요. 고학을 하면서 돈이 생기면 등록하고, 돈 떨어지면 휴학을 하고, 그렇게 해서 8년만에 졸업했습니다.”
홀어머니의 독자로 자랐는데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을 보면서 돈을 가져다 쓸 수 없었다. 아버지는 병으로 일찍 타계했다.
“나는 1936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고베 일본군 병원에 근무했습니다. 아버지가 일본 사회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본 아이들만 다니는 사가미하라 소학교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학급 아이가 마늘냄새가 난다고 나를 조롱하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인종차별하는 거예요. 그래서 두둘겨팼더니 부모님이 소환되었지요. 4학년까지 다니다 해방이 되어서 아버지 고향 돌산도로 돌아왔는데, 아버님이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장만한 농토로 농사를 짓지만 젊은 과부가 얼마나 노동생산력이 있었겠습니까. 어머니가 참 고생 많으셨지요. 여수에서 초중고를 마치는 길로 상경해 모교에 들어가 법관이 되려고 방학이 되면 절에 들어가 고시를 준비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니 독서를 많이 했고, 그것이 법관의 길보다 출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80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건강하신데, 비결은 무엇입니까.
“매주 관악산을 올랐지요.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쉬고 있습니다만, 대신 회사 주변을 걷습니다. 등산을 좋아해서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일본의 북알프스와 후지산, 대만의 옥산 등 5대주의 주요 명산을 등정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당시 대한산악연맹 회장인 이인정 동문의 요청으로 연맹 부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윤 회장은 매년 15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범우장학재단'을 30년전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다. 모교와 지역사회 도서관에 도서를 기증한 것을 비롯 국립 순천대에 장서 20000권을 기증한 바도 있다.
윤 회장은 모교 언론정보대학원 출강과 함께 연세대·서강대·중앙대·경희대 신문방송대학원 객원교수로 출강했다. 순천대에서 명예 출판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윤 회장의 장남 재민 씨가 대를 이어 범우(주) 사장으로 재직 중인데, 윤 사장 또한 동국 가족(81학번 사학과)이다. 현재 ROTC 동기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펴고 있다.
<이계홍:65학번 국문학과, 동창회보 편집위원장>
동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형두 범우사 회장, 이계홍(국문65) 동창회보 편집위원장, 신관호(경제69) 동창회장 특보, 윤재민(사학81) 범우사 사장. 윤길한(정외64) 서울교과서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