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대선의 유력 주자 … 뇌졸증으로 중도 하차
YS 핵심 참모 '좌동영 우형우'로 불려
하나회 척결 · 금유실명제 개혁 기여
고문과 회유 이겨내고 '민주주의' 외길 걸어
6선 국회의원. 민주산악회장, 민추협 간사장,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민자당 사무총장, 정무장관, 내무부장관(행정안전부장관) 등은 최형우(정치학과 57학번, 86세)동문의 화려한 이력이다.
최 전 장관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 8호선 복정역에서 택시로 약 10분 정도 남한산성 방향으로 달렸다. 큰 도로변에 위례신도시 힐스테이트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아파트단지는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평화롭다. 아파트 현관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집안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가 터져나와 밖에까지 들렸다. 마치 싸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여성 자원봉사자가 현관문을 열어주자 그 뒤에 최형우 전 장관 부인 원영일 여사(81세)가 휠체어를 탄 채 필자를 맞았다. 지난 1월 이사를 하는 중에 허리를 다쳐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다. 거실 소파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민 최형우 전 장관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반갑다는 의사 표시였다. 초인종을 누를 때 소리를 질렀던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민주화를 위해 사자처럼 포효했던 용장의 모습은 사라지고 쓸쓸한 외침만이 거실에 남아있는 것 같아 지켜보는 마음은 무거웠다. 최 전 장관은 필자와 악수를 나누는 중 갑자기 필자의 손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서툰 목소리로 “수고하십니다” 하고 말했다. 친근감을 보이는 정치인의 풍모였지만, 지능은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손은 솥뚜껑만큼 컸으나 팔은 살이 빠져 뼈만 남은 듯 앙상했다.
인터뷰는 부인 원 여사가 대신 맡았다. 최 전 장관은 1997년 3월 쓰러진 이후 한때 상태가 좋아졌으나 지금은 노환까지 겹쳐 다시 언어 표현이 불확실해졌다. 부인이 응답을 하는 가운데, 최 전 장관은 주기적으로 “지게미 씨*것!”하고 욕을 퍼부었다. 필자에게 화를 내나 하고 놀랐는데, 허공을 바라보며 무의미하게 외치는 일종의 ‘탄식’이자 ’절규‘였다. ‘지게미’는 그의 고향 경상도 울산 지역의 ‘지에미’의 사투리다. 부인 원 여사에게 물었다.
-왜 저렇게 욕을 하시지요?
“뇌를 다쳐 언어를 잃어버릴 때는 자신이 가장 비통하게 겪었던 악몽이 원초적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유신 시절 치아가 바스러질 정도로 고문을 당했을 때의 고통과,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 죽음 직전까지 몰려간 고문의 악몽이 의식 가운데서 되살아나 순간순간 저런 욕을 한다고 해요. 가장 비참했던 기억이 머리를 지배한다는 것이죠.”
대화가 깊어질 때마다 ‘쌍욕’은 마치 군가의 후렴처럼 쏟아져 나왔다. 정말 화를 내나 싶어서 그를 바라보는데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허공을 향해 무의식 상태에서 외치는 것 같았다.
최 전 장관의 민주화 투쟁 과정과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이 오버럽됐다. 필자가 언론 현업(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재직) 시절 시위대를 이끌고 광화문 광장을 앞장서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1997년 집권 여당의 강력한 대선 주자로 뛰던 시절, 김영삼(YS) 대통령 비서진과 갈등을 보였다는 얘기도 있었다. 부당하게 당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는 말도 들렸다. 그런 분노가 쓰러진 동인이 되었다는 안타까움들이다.
-벌써 많은 세월이 흘러가니 최 전 장관의 존재가 묻혀가는 것 같습니다. 근황부터 소개해주시지요.
“재작년까지 재활 치료를 받았지요. 보행 연습도 했고요. 그런데 코로나 19 이후 비대면 때문에 재활치료를 하지 못하고 24시간 내내 집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니 신체가 더욱 허약해질 수밖에요.”
최 전 장관은 육중한 몸에 강골의 신체를 갖고 있다. 그가 YS와 함께 시위대 선두에 서서 민주주의 쟁취, 독재타도를 외칠 때, 거리가 꽉 찰 정도였다.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박정희 퇴진을 요구할 때는 당시 집권 여당인 공화당을 긴장시켰다. 이런 투사를 중앙정보부가 가만둘 리 없었다.
유신반대 투쟁 때(1972년 10월) 그는 주 타깃이 되어 모 군부대에 끌려가 험한 고문을 당했다. 8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시절이다. 그는 김녹영 김상현 나석호 조윤형 조연하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등 동료 의원과 함께 중정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를 견디느라 치아가 바스러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원영일 여사는 이렇게 전했다.
“알몸으로 벗겨놓고 통닭구이, 얼굴에 수건 씌우고 고춧가루 물붓기, 전기고문을 가했어요. 이때 몸이 망가졌지요.”
최 전 장관 나이 36세 때의 일이다. 원 여사가 아들(최제완)을 출산했을 때였다. 돌도 안된 아이를 업고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것이 당시 원 여사의 주된 일과였다.
“김영삼 총재에게 돈 갖다준 기업인을 대라. 상도동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명단을 대라면서 고문했다는 것이죠. 의식을 잃으면 의사가 혈압을 재고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고문을 가했다고 해요.”
당시 정권은 그에게 놀랄만한 거금을 제시하며 회유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중앙회장 출신으로 국회 상공분과위원장인 유기정 의원을 통해 같은 분과 소속인 최 의원에게 대통령의 뜻이라며 거액을 제시하며 침묵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 성격을 잘 알지 않느냐. 가시밭길의 험난한 길 가지 말고 우리에게 동조하거나, 최소한 침묵이라도 지켜라, 라고 위협 겸 회유했어요.”
유신 말기에는 이후락을 보내 회유했다.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뒤 울산에서 국회의원에 공동 당선(당시는 1구 2인 중선거구제였음)된 이후락이 찾아와 5억원을 제시하며 YS로부터 결별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서울의 집 한 채 값이 1천만원 안팎이었으니 어마어마한 거액이다. 그러나 최 의원은 “나를 밟고 가라. 너희가 그렇게 탄압한다고 해도 상도동 조직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단칼에 거부했다.
“그런 식으로 변절을 유도하여 사람 못쓰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최 장관은 너무나 잘 알았지요.”
1979년 김영삼 총재가 외신기자회견을 빌미로 국회 제명되었을 때 목숨 걸기로 하고 비상약을 휴대하고 다녔다.
“YS 제명 후 연금 상태가 되자 광화문 네거리에서 분신하겠다고도 하셨어요. 한 사람이라도 민주 제단에 목숨을 던져야 한다고 하셨죠. 그 얼마후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는 시해사건이 났어요.”
그의 분신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 때 갈수록 사태가 악화하자 당시 미국 CIA 한국지부장 존 스타인에게 “이런 식으로 나가면 광화문 네거리, 아니면 미국 대사관 앞에서 분신자살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원 여사는 이렇게 전했다. 원 여사도 80객이니 시제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발언 그대로를 싣는다.
최 전 장관은 박정희 정권 시절, YS 제명 이후 그 역시 연금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박정희의 죽음을 미리 알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지인 서상록(전 삼미그룹 부회장)씨로부터 1979년 10월 27일 아침 갑자기 국제전화가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우리집은 24시간 전화가 도청되었기 때문에 제가 허튼 소리 그만하라고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최 장관에게 연결해주지도 않았어요. 이렇게 우리는 캄캄하게 지냈습니다.”
10.26 이후 민주화 과정을 밟는데 이번에는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해 그는 또다시 체포되었다. 80년 ‘서울의 봄’ 시절 상도동 핵심 좌장이었던 최형우 전 장관은 민추협 간사장으로서 조직을 재가동해 YS의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체포돼 동빙고동(보안사 분실)으로 끌려가 한달간 매일같이 전기고문 등을 당하는데, 고문 이유는 YS조직을 불라는 것이고, YS의 자금줄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그 얼마후 원 여사도 연행돼갔다. 생계를 위해 행상을 하던 때였다.
“검은 지프차를 탄 괴한들이 들이닥치더니 저를 압송해갔어요. 지프차에서 눈에 수건을 씌운 뒤 한참 가는데 들어간 곳이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였어요. 노신영 중정 부장이 저를 맞이해 식사를 제공하면서 최형우 의원을 건설부장관과 상공장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더군요. 이걸 가지고 설득하는데 누비이불 보따리 장사하며 살아가는 나는 악에 바치더군요. 그래서 회유를 접으라고 했지요.”
이때 중3인 큰딸도 동조했다. 어린 딸아이마저도 YS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공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온 집안이 민주주의 신봉자로 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이 “최형우만은 갈라 쳐라”는 엄명을 내려 최 전 장관과 가족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정보부에 끌려가 있을 때 최 장관이 부정축재자로 잡혀들어온 김종필씨를 만났던 모양이에요. 최 장관이 ‘당신이 쓸데없이 중앙정보부를 만들어서 선량한 시민 학생과 정치인을 피눈물나게 하고 있다‘고 항의했다고 해요. 그의 당당함에 JP는 3당 합당시절 내내 최 장관 눈치를 살폈다고 합니다.”
구금된 상태에서 매일 죽을만치 맞았다. 그래도 흐트러짐없이 버텼다. 결국 고문 수사관도 질려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최 장관의 고문 이력을 상세히 기록하는 것은 그가 쓰러지게 된 결정적 요인이 고문의 후유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YS가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그는 행동대장으로써 전면에 나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군부정권은 그를 회유하고 포섭했으나 거부하자 이렇게 불법 체포, 구금하며 위해를 가했던 것이다. 회유 내용은 미국으로 유학 보내주겠다, 장관 자리를 주겠다 등이다.
전두환 집권 시절 7년동안 묶여있다가 해금되면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뒤 지역구를 부산으로 옮겨 13대(88년) 의원에 당선된 이래 그의 활동은 본격화된다.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국회동력자원위원장, 3당 합당후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고, 민자당 사무총장, 내무부 장관(현 행정안전부) 장관이 되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은 전국 지방 조직을 장악, 대통령 선거를 총괄하는 행정 지휘부였다.
민자당 사무총장과 정무장관 시절, 그는 민정계를 제압하는 ‘행동대장’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노태우 대통령도 주춤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굽힘없이 민주화 장정의 최선봉에 선 이력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공무원 재산 공개등록 등 개혁 조치를 과감히 단행한 것은 최형우라는 용장의 추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때로는 망설였으나 최 전장관의 돌파력에 끌려간 경우도 많았다. 이 때문에 3당 합당 이후 민정계는 물론 JP계도 겁을 내며 그를 경계했다.
청와대 비서진도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를 비롯 김무성 전 의원 등 청와대 7인방이 그를 견제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 이를 돌파하며 대선 후보를 준비하다가 그는 불행히도 쓰러지고 만 것이다.
-최 전 장관이 쓰러지셨을 때를 되돌아볼까요?
“내무장관직을 마치고 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선 후보 경선을 치르기 전인 1997년 3월 11일, 민주계 서석제, 김덕룡 의원과 프라자호텔에서 전략회의를 하던 중 쓰러졌어요.”
뇌수술을 받은 이후 서울대 병원 3개월, 독일 마안쯔대학병원 치료, 세브란스 병원 5년, 삼성의료원 12년 등 지금까지 20여년동안 재활 치료를 받았다. 치료비가 산처럼 쌓이는 사이 호전과 악화를 거듭하더니 세월만 흘러갔다.
“독일 병원 치료에서 주치의가 말하더군요. 둔기로 맞거나 교통사고로 부딪쳤을 때, 또는 남자들이 골프를 칠 때 어느 순간 충격이 와서 경동맥이 막혀버린다고요. 12번을 끌려가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머리를 다치고 했으니 머리가 온전했겠습니까.”
최 전 장관은 민주화를 위해 언제나 거리의 선두에 섰다. 모교 재학 중인 4.19가 났을 때도 맨 선봉에 섰다. 10월 유신, 광주 민주화항쟁 때, 전두환 군부정권에 맞선 행동 등 투쟁의 복판에 늘 그가 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유공자 신청을 한 적이 없다. 돌이켜보니 민주화 투쟁만이 훈장처럼 남은 것 같다. 이제는 민주투사로서 그를 평가해주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최 장관은 치료중일 때도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늘 기도했지요. 지금은 모든 것이 소멸해가는 것 같습니다.”
최 전 장관의 좌우명은 ‘큰 강은 소리가 없다’는 대하무성(大河無聲)이다. 지체있는 유교 집안의 가문에서 나온 무게감의 좌우명이다. 최 전 장관의 고조부는 조선시대 통정대부 벼슬을, 조부는 한의사로 경상남도 관직시험 팡정관을 지낸 뼈대이쑈는 집안의 후예이다. 또 원 여사의 고조 · 증조부는 만석꾼, 조부는 4천석꾼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집안이 기울어져 최 전 장관이 정치할 때는 크게 돕지 못했다.
부인 원 여사와의 사이에 2남 2녀들 두고 있다. 장녀와 장남은 미국에, 4녀는 독일에 살고 있으며, 차남과 함께 살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최 전 장관이 한사코 현관문까지 나와 배웅하려고 했다. 보행이 불편했으나 정치인 특유의 친화력과 열정은 남아있는 듯했다.
이계홍<65국문학과·동창회조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