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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상기 특별 기고> 3살 아가의 6.25 전쟁 체험기

이돈희 | 2023.06.27 07:02 | 조회 671

<6.25 전쟁 상기 특별 기고> 3살 아가의 6.25 전쟁 체험기

- 이돈희 임마누엘 UN 평화대사/노인의 날과 세계어버이날 만든이

조은비 기자  | 입력 : 2023/06/25 [07:00]

 

 예수님의 계시와 복음 말씀을 전세계 만민에게  전파전도하기 위히여, 이돈희 임마누엘  본지 대표가,  예수님께서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 소재하며 로마에서 100km 떨어진 성 베드로 수도원의 마리아 세실리아 바이즈 원장 수녀(1694-1766)에게 발현하시어, 18세기의 예수님의 계시와 말씀이자  복음인 이탈리아어 VITA INTERNA DI GESU CRISTO <예수님 내면의 삶> 을   세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 발행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세계적인 공용어인 영어로도 번역 발행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 방법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유흥식 라자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님이 함께 또는 유흥식 장관님이 단독으로라도, 아틸리아인으로 이탈리아에 살면서 가장  훌륭하고 영성깊은 분으로 영어 번역인을 추천 또는 선정해주시며, 영어 번역 출판을 원서 이탈리아어로 출판한 이탈리아 출판사에서 출판하도록  합력해 주시는 일이다.  ©월드레코드

  

<6.25 전쟁 상기 특별 기고>  3살 아가의  6.25 전쟁 체험기

 

본지 이돈희 임마누엘 대표는, 아래의 글을 발표한지 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쟁을 막기 위하여 참고하실 펄요가  충분하여  6.25 전쟁 73주년휴전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2023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최고 국제기구요, 종교지도자요, 정치 지도자인 아래의,

 

 TO :

UN과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 미국 바이든 대통령, 러시아 푸틴 대통령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중국 시진평 국가주석, 대한민국 윤석열 대통령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지극히 나쁜 인간 행위의 대표적인 핵전쟁과 지역 전쟁과 분쟁 없는, 인간으로서 필요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 평화 통일과  같은 예수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이 일치하고, 올바른 종교의 자유 보장을 위해  하나의 대한민국 전쟁 사례로 간곡히 알려드리고, 호소드립니다

 

 

FROM: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5천2백만명 국민의 한사람으로서의 알림과 호소인 이돈희 임마누엘 드림

 

 

 

<6.25 전쟁 상기 특별 기고>  3살 아가의  6.25 전쟁 체험기

 

아무리 똑똑하고 박사 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천재이고 잘났어도한치 앞날을 모르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그래서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 것>처럼하느님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하느님을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한시간 앞 일을 다 안다면야 작년 7월 월드컵 때 대한민국 4강 진출을 위한 승부골 차기에서 순간순간 그렇게 가슴 조일 필요가없으며, 5분 앞만 미리 알아도 귀한 생명을 교통사고로 죽지 않을 것이며금년 2월의 대구역 화재로 200여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50대 후반이면 체험으로,50대 전반이면 부모에게나 친지에게 들어서라도 6.25 전쟁에 관한 비극적인 얘기를 조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어머니로부터 반복해서 들어서인지 6.25 전쟁 당시 3살 아가이면서도 기억나는 것이 있기도 하고 대부분은 모른다.

한가지는 식사전에 아버지 일찍 돌아오세요” 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나는 듯하다. “오늘이면 오실까?내일이면 오실까?” 하고 매일 매일한시간 한시간을 모자가 초조히 기다리는 아버지가 강원도 영월에 있는 건설현장에서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고오시지도 않자어머니가 시키는대로 식사 때마다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였다 한다또 한가지는피난 중에 비행기 폭격이 몇 번인가 있었던 것 같다.

세계적으로, 국가적으로 불의한 전쟁이 발생한  나라에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15년을 계속한 베트남 전쟁을 보라. 우리나라에서는 베트남 전쟁때 청룡부대ㆍ백마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하였었다.). 죽지 않으려고 수레에 짐과 양식을 싣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고몰래 들어야 하는 라디오 방송은 어제는 어디가 함락됐네오늘은 어디가 철수됐네” 하는 긴박한 순간마다 일분일초가 여삼추(如三秋아니겠는가?

생각해보라교통 발달한 요즘에는 서울과 그리 멀지도 않은 강원도 영월이지만공사 현장에서 소식 마저 없어, 3살 짜리 아들 하나 데리고 이제나 저제나 남편 발소리를 기다리는 21세 여심(女心)! (나의 어머니는 77년전 1946년에 산부인과가 없는 시골에서 살았으며, 산부인과 의료기술ㆍ수술이 지금같이 발달하지 않아서 산부인과 의사가 있다해도, 다 생긴 나의 형을 뱃속에서 8개월만에 사산한 심한 후유증으로 거의 평생을  고생하고 지내셨다.) 

한 달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집에서 죽으나 피난을 가다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면서도그래도 아들 하나 키우자면 시골 친정으로 피난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마음에서지금처럼 교통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포장된 길도 아닌 험한 길과 가파른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어느 길로 어떻게 가야할지믿고 의지할 남편과 동행도 없이며칠이나 걸릴지를 모르는 예측 불허의 전쟁터에서 몇 바가지 분량의 쌀과 갈아 입을 옷 몇 개만 머리에 이거나 양손에 들고 피난길을 떠나셨다 한다다른 짐이나 물건을 더 가지고 피난을 갈 수 없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더운 여름그마저 7월 중순 이후의 최고로 무더운 한 여름에 계속 걷게 할 수도걸을 수도 없는 내가 3살짜리 애물단지였기 때문이다.

2천여년전 만삭의 성모 마리아님이 예수님을 출산하기 위해 여관을 찾으시다가 마굿간으로 가신 상황과 무엇이 다른가비유가 잘못되었는지는 모르지만그래도 성모님은 하느님과 배필인 요셉 성인그리고 하느님과 대등한 아들 예수님이 태중(胎中)에 함께 계셨으니또 6.25 전쟁과 같이 오늘 어떻게 될지 내일은 어디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의 어머니처럼 공포스럽거나 외로우시진 않으셨을 것 같다.

꼬박 하루 걷고 이틀과 사흘을 걸으니 어머니의 발에 물집이 생기고 터져서 걸을 수가 심히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한다피난길에 나를 업으면 무겁고더우니까 땀띠가 생기고, 3살도 사내라고 불알이 아프다고 했다무거워서 잠시 내려 놓으면 몇 발자국 걷다가는 걷지 않으려고 했다고어머니에게 지금도 이 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피난이 무슨 놀이가는 것이 아님을 그 때 정황으로 보아 알았을 터인데도땀띠가 따갑다는 핑계를 대고, 작은 고추가 어머니 등에 눌려서 아프면 그걸 구실로 안 업히고나무 그늘만 보면 쉬어가자 하고다시 걷자 하면 반대 방향으로 도망갔다니걸음이 느려서 업으면 업힌 채로 얌전히 있거나무거워서 잠시 내려 놓고 좀 걸어라 하면 걸을 것이지 쉬어가자고 자꾸 떼만 썼다고 한다같이 피난 가는 아들이 요 모양인데남편이 함께 하지 않는 어머니의 불안·초조·절박한 마음 그 누가 알아 줄 것인가?

3살 아들이었던 나는 훗날 어머니로부터 여러번 들어서 안다.

간절히 기도하면 아버지가 돈희 보러 집에 빨리 오신다.”는 한달 동안의 기도가 효험이 없는 것을 알자어린 나이에 오늘 어떻게 될지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고 피난을 가는 처지이면서도어머니가 기도하자 하면 더워 못하겠다졸려서 못하겠다.” 핑계를 대며 하품만 하면서 기도를 안 했다나했다나.

피난 시작 이틀째 서울 광나루에서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긴 행렬로 나룻배를 기댜리는 중에옆에 세워 둔 내가 없어졌다어머니가 한참을 피난민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할 수 없어 걱정하고 있는데온 몸에 강 모래 먼지를 확 뒤덮어 쓴 내가 엄마” 하면서 울며 어머니를 찾아 왔다고 한다어머니 말씀으로 내가 비행기가 쏜 폭탄의 바람에 날려갔다가 찾아온 것이라 한다나는 기억에 없기 때문에 모른다하지만 어머니의 평소 아주 내성적인 인품이나 성격으로 봐서 이 정도 황당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없는 것을 꾸며 말하는 어머니는 더욱 더 아니기에 자식으로서어머니의 말을 소설가적인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나를 찾았다면 누구나 나를 믿지만날려갔던 내가 어머니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내 아내마저 믿지 않으니 누구에게도 믿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근처에 폭탄이 떨어지면 온 몸이 어떻게 되든지 죽었어야지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설명들에 대해 반박할 말을 없지만어머니는 당신의 6.25 피난사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수 차례 말씀해 주셨으니 실제 상황인 것 같다.

빵 5조각 물고기 2 마리로 남자만도 5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광주리 12개가 가득찼다는 예수님은 못할 일이 없으시다는데훗날 나를 어떤 형태로든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혹시 그 예수님께서 작용을 하신 것인가?(가톨릭 평신도인 내가 대학생 청년때인 1968년에 노인의 날을 만들었는데, 반세기가 넘는 53년 후인  2021년에 노인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세계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반포하셨다.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마리아님으로 볼때는 친정아버지 어머니이지만, 예수님으로 볼땐 외조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분명히 노인이다. 성모 마리아 보다 신앙의 중심인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으로 기준하면 분명히 세계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요아킴과 안내의 축일인 7월26일과 가장 가까운 날짜의 주일을, 세계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정하신 것이다. UN에서 1990년에 제정하고 1991년부터 시행되어 온 세계노인의 날이 이미 있는데도, 신앙적인 사목적인 목적에서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한 것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발행ㆍ 매일미사 7월호 '7월23일 연중 제 6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7월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 안나 기념일' 참조) 

어머니가 글이라도 한 페이지 남길 능력이 있으시다면 다른 것은 안 써도 당신이 피난 중에 체험한 그 사실만은 쓰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불행한 여자의 일생을 74년이나 살아 오셨음에도, 자서전은커녕 편지 한 장 안쓰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둔 당시 3살 아가인 내가 대신 쓰게 되었을 뿐이다.' 주위에서 보면 건강한 부모가 결혼 60주년인 회혼식(回婚式)을 맞으면 축하해주고 떠들썩하다.

어머니도 내년이면 회혼식을 맞이하지만현관에도 안나가고목욕은커녕 손발도 안씻으려하고남을 만나는 것도찾아오는 것도 싫어하시는 우울증ㆍ 조울증이 반복되는  환자인 어머니에게 회혼식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광나루에서 폭탄에 날려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그 날로 고아가 되었거나 죽은지 이미 오래일 것이다. 먹고 살아가기 위해 거지가 되어 동냥을 다녔거나 불량자나 천하의 사기꾼이나 깡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귀하도 직접 경험하셨거나 주위 친척·친구·각종 매스컴을 통해 충분히 아시겠지만인간의 생사나 운명은 한 순간에 결정되기도 한다. (성폭력 남자 가해자는 대낮을 활보하는데, 불의의 피해자 여성은 평생을 불안해하고, 죄의식으로 산다.)

피난 둘째날 모자간의 이 경험이 어머니와 내가 외갓집인 경북 의성군 다인면 신락동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18일이 걸린 각가지의 어려운 고난을 참고 나아가게한 동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광나루 뱃가에서 폭격으로 나를 잃어버렸다면 어머니가 당신 혼자라고 홀가분하다 생각되어 외갓집으로 피난가실 정신력이나 건강이 있었겠는가?

피난중에 고향이 비슷해 뒤따락가면 되겠다.” 생각하고 안심히고 따라가던 동행을걷게하면 내 걸음이 너무 느려서 떨어지고나를 업어도 내가 무거워 어머니도 금새 걸음이 느려저 떨어지고다시 다른 동행과 몇 십 번을 만나고, 또다시 떨어지면 길도 모른 채 걸어가야만 하던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피난살이의 하루하루의 나날과 순간 순간의 공포와 위기와 생지옥 같은 삶을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국민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라고 침략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나? 

피난 중 찬밥을 얻어먹거나 잠을 자기 위해 남의 집 대문을 들어가면, 어떤 노인은 어머니를 시집간 당신 딸나를 외손자처럼 생각하여 저녁도 주고 목침을 화롯불에 달구어서 터지고 진물이 나 쓰라린 발바닥에 대주어 낫게 해주셨다 한다다음 날 먹을 밥까지 담아주는 할머니도 있었다 하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이신가이런 분들 덕택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6.25 전쟁 피난길에 귀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주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고마운 분들게 이 책을 통해서 감사를 드린다그 분들이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몰라서 안 믿었어도 천당이나 극락에 가셨을 줄을 나는 확신한다이 책을 쓴 목적의 하나가 피난 중에 도와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기 위함이다. 나의 귀한 독자 여러분들도 감사드릴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명랑사회를 이룩하고 싶은 까닭이다그 전쟁중에도 친정에 도착하면 감사의 편지를 꼭 올리고 싶은 마음에 고마운 분들의 주소를 종이 어딘가에 적으셨다 한다그러나 피난 중에 빠트린 것도 있고편지를 한 것도 답이 없으셔서 들어 갔는지안들어 갔는지를 모르는 편지도 있으셨다 하니혹시라도 못받으신 분은 이 아들이 대신 용서를 구하면서감사를 드린다사람은 결코 혼자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고남의 도움으로 사는 것인데  하느님과 사람인 부모와 합작픔으로, 귀한 영혼과 양심을 받고 태어난 그 후손인 사람이 그것을 모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들판과 험한 산을 넘는 동안 나를 업은 어머니가 죽을 힘을 다해 올라는 갔지만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무서웠고내려가던 중 한발자국도 걸을 힘이 다 빠진 다리로 헛디디어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서 밥과 물을 얻어먹던 바가지는 박살이 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업힌 나의 포대기를 풀고서본능적으로 당신 몸보다 나의 얼굴과 몸을 살펴 보았는데 크게 긁히거나 상처는 안보였지만 그래도 아픈데가 있지 싶어 나에게 물어 보았더니, “엄마 난 안아파엄마 아파?” 했다 하나이것이 내가 3살 때부터 효자라서 그런 말한 것은 분명 아닐테고우리 모자의 앞날을 주관하시는 섭리가 아니고 무엇일는지걸어 내려오자면 한참 걸릴 산을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온 결과가 되었다고 모자가 감사했는지 모를 일이다.

다리 아프다고 걷기 싫어하다가도 곳곳에서 누가 검문을 하면 어머니와 손가락 걸고 굳은 약속을 한 듯 내가 잘 울어대 국군 인민군 할 것 없이 젊은 엄마남편도 없어?. 빨리 피난이나 잘 가라” 며 까다롭지 않게 하여 어머니가 나의 덕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3살 아가가 국군 인민군을 구별할 줄 알아서가 아니라 어머니를 붙잡는 남자는 모두 무서워 울어버린 것일텐데순간 순간 어머니에게 효자 노릇을 잘 한 것이 되었다. 21세로 젊디 젊을 여자일 뿐인 나의 어머니도 불시에 검문하는 시커먼 국군이나 인민군이 피난 중에  걸리면 왜 두렵거나 안 무서웠겠는가오직 당신 목숨보다 귀한 아들 죽이지 않고 어떡하든지 천리밖에 있는 친정에그리고 남편에게 데려가겠다는 일념 아니었는가?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누가 말했나?

어머니가 18일 만에 우열 곡절끝에 걸어 걸어서 외갓집에 도착했을 때전쟁이 나고 50일가까이 생사를 몰라 소식 기다리느라 안절부절 못 했던 외할아버지는 마당과 안방을 몇시간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시면서 왔으니 됐다. 왔으니 됐다.” 는 말씀만 하셨다고 한다.

그 전쟁중에 밤낮 18일 동안을 3살 짜리 자식을 얻어먹여가며 업고걸리고대문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진 후, 몇날 며칠을 의식불명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는데그 딸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외할어버지의 심정이 오죽하였겠으며,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여름 중에도 한 여름인 725일부터 812일까지의 뙤약볕 속에서의 6.25의 피난은 박완서님의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가 아니라 유별나게 더웠다고 한다어떤 경우에도 자식 앞에서 울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맹세를 스스로 하셨던 어머니가친정 집 마당에 쓰러지면서,무슨 힘이 남았을까만 기절하기 전에 한참을 대성통곡 하셨다고 한다어미로서 자식에게 할 일을 다 했다는 성취감과 이렇게 걱정하시는 친정부모님 앞에 도착했으니불효는 면했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눈물 아니고 무엇이랴?

어머니가 강한가아버지가 강한가아버지 소식 궁금해하는 어머니가 외갓집에 도착한 날시골도 낮에는 폭격이 심해서 가장 안전한 곳에 피신해야 되고밤이 되야 망을 보아가며 조금이나마 움직이던 때외할아버지는 위험하다고 온 가족을 문 밖에는 일체 나가지도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다고 한다아무리 외할아버지의 엄명이라도외할머니는 어머니가 도착하자마자 외할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나와 10km 정도 떨어진 나의 고향(경북 상주시 낙동면 장곡동)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셨다고 한다교통이 불편했던 1950年代에 20~30리를 걷는 것은 보통이므로 그걸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외갓집에서는 아버지 계신 낙동면 장곡동으로 가자면 다리가 없는 낙동강을 건너야 갈 수 있는데피난 중이라 나룻배가 안다니는 것을 알고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려는 일념‘ 하나로 밤중에 집을 나와 낙동강 뱃가에 가셨다고 한다평소에 잘 아는 뱃사공에게 그 강을 건너 주길 애원했으나 위험하다고 건너 주질 않아서 치마를 양손으로 가장 높이 뒤집어 올리고 그 강을 건너셨다고 한다외할머니가 강으로 걸어가자 뱃사공이 배로 건너 주지는 않으면서도 이쪽,저쪽물길이 얕은 쪽으로 가라고 고함을 질러주더라 하셨다물의 깊이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낙동강을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하루 바삐 만나도록 하기 위해 치마를 한껏 올리고 죽을 각오로 강을 더듬고 더듬어 건너신 것이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 환자인 어머니 젖은 해롭다고 짜서 버리며일부러 못먹게 하고, 태어날 때부터 외손자인 나를 위해 안나오는 당신 젖을 빨리고, 빨다가 젖이 안나온다고 배고파 울면 외할머니 당신 치마에 같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동네 집안 아주머니를 찾아 아주머니 집에서고, 논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찾아  젖을 먹여 주시던 그 외할머니가 딸을 위해 낙동강을 맨 몸으로 건너신 것이다. 어쨌던 국가의 지도자는 결단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아버지 어머니가 코피 터지게 싸우면 그 자녀가 불쌍하게 된다. 그 자녀가 무슨 죄인가? 그 국민이 무슨 죄인가? 벌인가? 나의 좁은 소견에 의한 결론이므로 틀릴 수도 있겠으나, 공산주의자는 자기들이 아무리 잘못을 하고도 진정한 사과는 커녕, 그 잘못을  절대로 입밖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얼굴 똑바로 처들고 또다른 잘못을 계속 밥먹듯 만들고 있다.

필자가 1971년 4월 8일에 세계최초로 발표한 <노인의 날 제정 취지문>에서는 말하지 못했지만앞서 말한 피난길에서저의 모자에게 도움주신 노인분들과 나의 외조부모님의 이러한 한 없는 사랑이 존경스럽고 고마워 그 3년전인 1968년에 <노인의 날>을 만들게 된 이유의 하나였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씀드린다아버지가 영월에서 어머니와 내가 있던 서울로 못 오신 이유는 건설현장 최고 책임자이다보니 끝까지 마무리하여야 할 직장인으로서의 모든 의무와 책임감 완수 때문이었다.  

 

추신위 글은, 20년전 2003년에 도서출판 범론사에서 발행한 『 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 라는 404페이지 저서에서 27 페이지~ 34페이지 까지의  제 1부 저자 이야기, 제 2부 작은 소품들, 제 3부 잡지 인터뷰ㆍ글 모음, 제 4부 신문 인터뷰ㆍ 글 모음, 제 5부 방송출연 모음 중 제 1부 3 [ 6.25라는 전쟁]에 나와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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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희 본지 수석부사장 겸 수석논설위원 / UN 평화대사 

 LEE DONHEE  SENIOR VICE PRESIDENT & EDITORIAL WRITER/ UN PEACE

AMBASSADOR 

ㅣEE DONHEE'  e-mail address : donhee20@naver,com